기록없애면 사건도 없어지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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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산에 묻은 경찰조서와 공직사회 기강
대전에서 일어난 경찰수사 서류 무더기 은닉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놀라움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경찰서 안에 있어야 할 무려 5백6건의 처리가 끝나지 않은 수사서류가 어떻게 야산 흙속에 묻혀 있을 수 있는가.
보도에 따르면 이들 사건은 대부분 시민고발사건들이었고 다른 시ㆍ도에서 넘겨온 사건도 많았는데,민원실에는 접수돼 있었으나 사건접수부에는 기록도 돼 있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경찰은 이같은 무더기 서류 은닉사건을 제보를 받고서야 알게 됐고,이를 알고도 나흘이 지난 4일 현재까지 누구의 소행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건의 완벽한 수사와 철저한 처리를 기대해온 우리로서는 일종의 배신감마저 곁들인 허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6공 이후 공공기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다는 말을 새삼 하고 싶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공명정대한 민생사건 수사와 빈틈없는 내부관리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경찰에서 상식밖의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은 범인을 두 갈래로 찾고 있다고 한다. 담당자가 치안본부 감사에 대비해 미제사건 흔적을 없애려 숨겼을 가능성과 최근의 내부인사에 불만을 품은 자가 상급자를 골탕먹이기 위해 그랬을 가능성을 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어느 것이든 경찰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린 일임에는 변함이 없다.
더구나 해당경찰서는 연 이태 동안 민생치안 실적 전국 1위를 하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내부기강이 얼마나 허술하며,시민생활과 직접 관련되는 사건을 수사함에 있어 얼마나 무성의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고소ㆍ고발사건을 접수부에 등재도 않은 채 처리시한인 3개월은 고사하고 1∼2년씩 묵혔을 뿐 아니라,이해 쌍방이 있는 사안을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마음대로 빼낼 수 있을만큼 허술하게 다루고 있었음을 첫째로 지적해 두고자 한다.
두번째로 경찰이 어떤 사건을 접수하고도 얼마나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치안본부가 직접조사에 나섰다니 사건의 전모는 더 두고봐야겠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경찰을 포함한 전체 공직자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기강해이를 경계하면서 특히 경찰은 철저한 수사로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문제을 따져 지위고하를 불문한 문책이 있기를 촉구한다. 경찰은 국민의 마음으로부터의 신뢰를 잃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 사건을 해이해지고 있는 공직사회 전반에 대한 일벌백계의 원칙으로 엄중한 문책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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