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기업하기 힘든 나라' 만드는 상법 개정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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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부가 상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대부분 법무부가 6월에 마련한 시안 그대로다. 기업을 옥죄는 내용이 많은 데다 경영권 방어 장치는 빠져 있어 그동안 재계가 여러 경로를 통해 재검토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업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이중대표소송제.집행임원제 등이 포함됐고, '황금주(Golden Share)'와 같은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어 장치는 마련되지 않았다. 기업의 요청에는 귀를 막고, 시민단체의 주장은 받아들인 결과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세계에서 입법 사례가 없는 이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하면서 선진국에 일반화된 M&A 방어 장치는 외면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 정부는 기업이 소송과 경영권 방어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는 점을 모르는 모양이다. 외려 상법 개정 특별위원회나 공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은 '회사기회의 유용 금지'와 같은 또 다른 규제가 덜컥 포함됐다. 재계로서는 도대체 특위는 뭐 하는 곳이며, 공청회나 정.재계 간담회는 왜 했느냐는 원성이 나올 법하다.

재계가 가장 걱정하는 규정은 이중대표소송제다. 이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에게 소송을 낼 수 있는 제도다. 도입되면 소송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30대 그룹의 540개 비상장 자회사 가운데 절반 가까운 264개사가 이중대표소송에 노출된다는 조사도 있다. 게다가 이 제도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경영을 간섭하는 모순을 낳는다. 자회사 이사가 자기 회사보다 모회사 이익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경우도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일본도 한때 논의했다가 도입하지 않기로 결론 낸 제도며 세계적으로 입법 사례가 없다. 미국은 기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증권집단소송제의 근거가 되는 '사베인스-옥슬리 법'의 개정을 추진 중인데, 우리는 완전히 거꾸로다.

지난달 말 정부가 알맹이 빠진 기업환경 개선대책을 마련한 데 이어 이번 상법 개정안으로 재계의 4대 숙원(수도권 공장 설립 완화,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M&A 방어 장치 마련, 이중대표소송제 재검토)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 정부가 누누이 강조해온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기업 군기 잡기'를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와 시민단체가 기업을 윽박지르는 통에 국민 사이에 은연중에 퍼진 반기업 정서가 중국.일본보다 심하다고 한다. 자연히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은 줄어들고, 기회만 닿으면 해외로 공장을 옮길 생각을 하는 기업인이 늘고 있는 모양이다.

기업은 원화 강세와 원자재가 상승, 세계경제 둔화, 금리 인상의 4중고를 겪고 있다. 정부가 기업을 도와줘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틈만 나면 규제와 세금으로 압박하고 있으니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고 싶다. 기업이 위축되고, 문을 닫으면 이 정부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분배고, 균형발전이고 다 수포로 돌아간다는 점을 한번쯤 곱씹었으면 한다. 선진국에도 없는 제도까지 도입하면서 기업에 지나친 부담을 지우는 상법 개정안을 재검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