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벼랑이 안보이는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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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극한사고ㆍ과격대결은 억지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지켜 보면서 우리는 도대체 이나라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심각한 우려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 국민의 불신을 사고,경제가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지 못하며,사회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바로 얼마전까지도 우리가 가슴에 품었던 미래에의 희망과 기대 대신 불안과 좌절감을 안겨주고 탄식과 분노를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와 한꺼번에 두배씩 뛰어오르는 집세로 서민들의 기본 생계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고 기업은 수출부진과 노사문제,자금난으로 아직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으며 주가 폭락으로 기업의 미래에 투자했던 중산층들이 엄청난 자산손실을 입고 분노와 좌절을 삭이지 못해 거리로 뛰쳐 나오고 있다.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못가진 자는 못가진 자대로 자기가 선자리가 끊임없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속에 방향감각을 잃고 허둥거리고 있다.
사회는 사회대로 이익집단간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한채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극한대결속에 원초적 혼란을 되풀이 하고 있다.
정부가 임명한 사장이 마음에 안든다고 집단행동으로 치닫던 노조가 공권력과 파워게임을 벌이고,법을 어겼다는 혐의로 구속된 동료를 석방하라는 생산 현장 근로자들이 경찰과 대치,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벌건 대낮에 화염병으로 무장한 대학생들이 대구시경에 쳐들어가 승용차를 때려부수고 농성을 벌이는 사태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이나라에 법질서가 살아있는지 의심치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어디까지가 적법이고 어디까지가 위법인지조차 구분이 안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처럼 국민생활이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데도 나라를 경륜해 보겠다고 나선 정치인들은 파벌싸움,영역다툼에 편할 날이 없고 민생안정과 질서유지에 1차적 책임을 지고있는 정부는 정부대로 악수와 패착으로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KBS사태만 해도 사장을 뽑은 이사회는 방송사가 며칠을 두고 시끄러워도 아무 얘기가 없고 즉흥적인 지역개발 선거공약과 금융실명제 예고로 부동산 투기를 부추겨 놓고 투기의 주범을 기업으로 몰아 공장부지 혹은 사무실ㆍ연수원용으로 사놓은 땅까지 팔아 치우라고 불호령을 내리는 작태도 선뜻 납득이 안간다.
부동산을 팔려면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할텐데 부동산 사는 사람은 무조건 죄인이 되고 있는 풍토에서 이같은 정부의 호령이 어떻게 먹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주가가 떨어지는 것을 구경만 하다 어느날 느닷없이 심야회의를 열고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떠난 재무부장관을 도중에 불러들이는 즉흥적이고 전시적인 대책이 과연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같은 모든 파행과 시행착오에 그나름의 불가피한 사정과 이유가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과거가 잉태한 요인들이 지금의 사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6공이 출범한게 이미 2년이 지나 집권 중반기에 접어들었고 거여의 출범으로 정부의 의지가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반도 조성된 마당에 국정이 계속 혼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파행을 되풀이하고 있다면 일단 그 1차적 책임은 정부와 여당의 국가관리능력ㆍ위기관리능력의 결여에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정부나 여당에 돌리려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위기는 전환기의 과도적 진통의 요소가 더 크다. 6ㆍ29선언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의 거부와 민주화요구,계층간ㆍ부문간ㆍ지역간 불균형의 시정과 배분ㆍ복지의 증대에 대한 욕구,그리고 이같은 요구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제도와 관행의 변화,저임시대의 종언과 고임시대의 개막등이다. 국민의식 구조의 변화는 우리 사회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과는 다른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금의 혼란과 위기상황은 앞서가는 의식과 이를 따르지 못하는 현실과의 괴리에서 빚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지 모른다.
말하자면 지금의 위기는 단편적ㆍ평면적ㆍ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매미가 애벌레에서 껍질을 벗고 탈바꿈하듯 보다 성숙된 사회로 가기 위한 진통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같은 새로운 의식과 욕구를 채워줄 이념도,도덕률도,행동양식도 마련해 놓지 못한 상태에서 전환기를 맞게 됐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권위와 가치관을 부정하는 데까지는 이르렀다해도 새로운 가치질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작업은 뒤처져 있다는 얘기다.
새 상황에 맞는 가치질서의 창출은 물론 정치지도자들을 포함한 이나라 모든 지도계층이 맡아야 할 일이다.
정치지도자들이 말로는 민주화를 외치면서 과거의 권위주의적 사고와 의식구조를 버리지 못하고 그위에 도덕적 정당성을 갖지 못할때,그리고 공무원들의 일하는 자세가 무책임과 보신주의의 틈을 벗어나지 못하며 기업인들의 치부가 정당성을 의심받을 때 새질서의 창출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작업은 동시에 온 국민의 자각과 인식의 전환도 요구하고 있다.
민주화를 앞세우면서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격한 행동으로 스스로 만든 법질서와 규칙을 깨뜨린다면 어디에서 민주화의 싹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사회는 벼랑을 향해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위기상황이 가중되고 있음을 누구나 느끼고 있다.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고 벼랑을 피하려면 극한적인 사고와 과격한 대결을 배척하는 온국민의 결집된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정치인 ㆍ공무원ㆍ기업인ㆍ근로자 모두가 냉정한 자세로 제자리로 돌아가 맡은바 일에 충실하지 않고는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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