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조·장을병 교수 대담|10·26 10주 영욕의 18년「박정희 시대」를 평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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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지 10년이 다가온다. 해방 후 최장기 집권자인 그의 18년 통치를 놓고 아직은 역사적 평가를 하기가 이른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가고 난 후 제5, 6공화국을 거치면서 차츰 긍정과 부정의 엇갈린 평가가세인의 관심사가 되고있다. 중앙일보는 한승조(고대)·장을병(성대) 교수의 대담을 통해 박정희 18년을 평가하고 국민들의 시각에 관한 여론조사를 통해 알아봤다.
▲한승조 교수=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이 10주년이 됐습니다. 제3공화국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5·16부터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탄생한 정부들은 처음엔 입헌민주주의를 지양하지만 모두 군부통치로 바뀌었지요. 이런 현상이 바람직 하느냐의 여부와는 별도로 후진국의 보편적 현상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5·l6혁명은 예외적인 성공사례였습니다.
우선 지도층이 과거의 신분적 엘리트에서 근대적·업적 지향적 엘리트로 교체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행정·경제·사회적 근대화의 터전을 닦았지요. 또 지속적인 경제성장, 계획된 근대화의 계기가 됐습니다.
▲장을병 교수=역사의 발전을 평가하는데는 삶의 질이 향상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경제발전의 측면과 함께 인간자유의 발전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두 가지 지주입니다. 군사쿠데타가 아니면 경제성장을 했겠느냐는 견해엔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더구나 60년대는 세계적으로 제3세계의 근대화, 발전이론이 확산됐던 시기로 민주당정권이 지속되었어도 경제발전은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정상적인 질서는 자율적인 질서여야 하는데 이걸 깔아뭉개고 쿠데타를 일으켜 외생적·타율적 질서를 가져온 건 역사를 오도한 겁니다.
▲한=인간의 역사를 자율성·주체성에 두는 건 반대하지 않습니다만 자유란 추상적이에요. 당면한 건 가난으로부터의 극복입니다. 최소한의 물질적 배경이 있어야 자유로운 거지요. 자유란 하루 이틀에 신장될 순 없고 한국의 경우 빠르면 50년, 늦으면 1백년은 걸려야 정상적 민주주의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런 면에서 박정희씨는 가난극복이라는 한가지는 할 수 있었잖아요. 그의「결의에 찬」리더십이 없었다면 정치·사회적 안정이 없었을 거고, 외국의 투자도 없어 급성장하지 못했을 거예요. 한일회담으로 배상금 7억 원을 받아 경제개발을 시작했는데 박대통령이니 할 수 있는 일이었지 다른 정권 같으면 6·3데모로 무너졌을 겁니다.
▲장=박정희씨의 지도력이 경제성장을 급속하게 추진시켰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6·3사태는 졸속하게 민족의 정기를 저버리고 몇 푼의 돈올 얻은 데 분개해 일어난 겁니다. 급기야 정부는 계엄령이란 무력으로 진압에 성공했지요. 그렇지만 70년대 중국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것을 보면 중요한 건 일본의 사과였습니다. 보상이 적어도 부당한 40년 역사에 대한 사과를 받았다면 민족자존이 이렇게 허물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한=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한 교수는 옥스퍼드대학이 영국의 역사를 주도했지만 현실문제에선 항상 패배하는 쪽이었다고 하더군요. 돈을 받아 뭐 하느냐는 젊은이의 목소리도 옳지만 그건 외치는 것으로 족합니다.
▲장=현실적으로도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불씨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건 집권세력이지요. 박정희씨 아닙니까.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철저히 어겼죠.
3선 개헌과 유신쿠데타도 그렇죠. 정부가 하는 일은 정반대로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하게 한 게 박정희씨입니다.
▲한=박정희씨는 전역 식을 하면서『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 바란다』 는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결정은 민족중흥을 위해서였지 권력을 잡고 안 내려가는 건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에요. 다시는 출마를 않겠다고 했지만 내친김에 어느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해보자고 한 것 같아요. 유신 때도 미군철수설, 월남위기, 미-중·일-중의 급속한 데탕트 등으로 국가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주국방을 해야겠다는 안보위기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 국민약속은 작은 것이고 자주국방·경제성장은 대의에 맞는 것이라고 본 거죠.
▲장=박정희씨가 유신쿠데타만 하지 않고 야인으로 돌아갔다면 현대사를 쓸 때 여러 가지 흠이 있어도 경제발전을 이룩한 민족중흥의 기수로 기록하겠습니다만…나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게 유신쿠데타입니다.
유신쿠데타는 대내외 양 측면을 함께 봐야합니다. 71년 핑퐁외교로 동북아는 화해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박정희씨는 95만 표 차로 김대중 후보를 이겼지만 부정선거를 하지 않았으면 그만한 표 차로 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 하나는 통일을 빙자해 독재권력을 강화한 겁니다.
▲한=유신이 잘못됐다고 보지만 그 어려운 상황에서 경치안정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당시 농업에서 경공업,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넘어가면서 실패해 인플레와 부동산가격 폭등이 초래됐죠. 그게 부마사태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미국의 레스니 립슨 교수는 처칠을 가리키며『저런 사람은 정치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고 정치학자가 저 사람을 놓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대통령은 의회정치·정당정치·선거를 부정한 사람으로 보편적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소신을 갖고 밀고 갔습니다. 민주정치를 왜곡하고 인권탄압·정보정치를 한걸 인정합니다만 자신의 스타일로 정치를 했고, 역사적으로 보면 나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장=어떤 제도이건 자기를 수정할 수 있는 제도는 유지 발전되지만 자기 잘못을 은폐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을 억압해 자기 수정할 방책을 망가뜨리는 제도는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신체제는 비판하는 사람을 탄압했습니다. 74년 1월 유신헌법에는 국민에게 개정권이 없어 비판을 허용토록 청원을 냈으나 긴급조치 1호로 억압했지요. 그리고 75년 5월 긴급조치 9호로 자기수정을 할 방책을 철저히 파괴해 유신체제의 필연적 종말이 잉태된 겁니다.
역설적으로 박정희씨가 한국역사발전에 기여했다면 남미의 군부독재가 너무 철저해 몸으로 부대끼며 의식화되어갔듯이 긴급조치를 통한비판세력 탄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자각이 생긴 점입니다.
▲한=박대통령의 업적은 자주국방체제확립·자립경제·민족자존확립 등이 있습니다. 유신당시 동서데탕트는 있었으나 김일성의 의도는 남한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적십자회담을 시작할 때부터 땅굴을 판 것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우리보다 멀리 내다본 건 지도 모르죠. 어쨌든 박 정권 18년이라 하나 그 시기에 민주주의·민족주의·경제발전·복지정책을 다하기를 바랄 순 없는 거지요.
▲장=10·26정변 자체는 역사적으로 불행한 정치변혁이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자기수정 메커니즘이 파괴돼 파멸의 필연성이 있었던 겁니다. 70년대 후반부터 유비통신과 카더라방송이 퍼져 체제의 부작용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그리스신화에 하느님이 어떤 사람을 망하게 하기 전에 반드시 미치게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70년대 후반 육 여사가 죽고 나서 박씨는 합리적 판단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간과해서 안될 것이 78년 12월 12일 선거에서 공화당 31·7%, 신민당 32·8%, 통일당 7·4%로 야당이 압승했습니다. 이것이 5·30신민당전당대회에 연결돼 선명 야당을 부르짖는 김영삼씨가 총재에 취임하고 재야와의 연계투쟁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수정능력도 없고 광적으로 된 박정희 체제에 큰 타격을 주게됐고, 마침내 야당총재 제명과 이로 인한 부마사태를 유발, 10·26의 요인이 됐습니다.
▲한=나도 유신2기부터는 희망을 상실했었지요. 76년부터 권력분산·지자제·권력기구와 기능집단을 분리한 자율성 확대 등 방향전환을 주장했으나 엉뚱한 데로만 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80년대에 와서는 유신의 과오를 장기집권이라 보고 장기집권을 안 하는 것으로 신임을 얻으려 했습니다. 즉 외형적 민주주의를 시작하려한 거죠. 그러나 행정부주도, 거대한 관권통치는 어정쩡한 상태로 계속됐습니다.
▲장=10·26은 정상적 정치변혁이 아니므로 좋았다거나 나빴다고 간단히 규정할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통해 뭔가를 배워야 하는 게 후세 사람의 지혜입니다.
▲한=박대통령은 한 분이지 두 분이 될 수 없으며 처음이자 끝입니다. 한국사람은 그의 위대한 업적을 인정하지 않지만 외국사람, 특히 중국이나 동구에서는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 한 지도자가 모든 걸 할 수는 없으니까요.
▲장=우리 국민은 지나친 망각의 습성이 있습니다. 공화당의 재출현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만 요즘 박정희씨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뀌는 분위기도 가볍게 봐선 안됩니다. 그 뒤에 이어진 전두환·노태우 정권과 비교하고 현실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에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순 없지 않느냐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박 정권 같은 반민주적·반민족적 정권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봅니다.<정리=김종국 기자>
10·26 1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사가 부설 여론조사기관 중앙SVP를 통해 지난 20, 21일 전국의 20세 이상 남녀 1천명을 상대로 전화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박대통령 집권 18년의 공과에 대해 61%가「공적이 많았다」고 답했고「과오가 많았다」고 한 사람은 13·7%에 불과했다.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4대1의 격차를 보였다.
대표적 공적으로 두 가지를 고르게 한데 대해 경제성장 및 가난극복(60·8%), 새마을운동 및 농촌개발(59%)이 가장 높게 평가됐으며 다음으로 34·4%가 고속도로건설, 14%가 국방력강화를 들었다. 경제 쪽에 높은 점수를 매기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거꾸로 가장 큰 과오를 두 가지씩 뽑는데는 장기집권(56·8%)이 가장 많았고 독재정치· 권력남용(39·4%), 세 번째가 군부정치·군사쿠데타(32·4%)이었다.
다음으로 언론탄압(15·9%) 지역차별(11·6%)이 지적을 받았다. 인권유린(6·9%) 사생활·스캔들(5·8%)은 비교적 적게 지적됐다. 전반적으로 그의 통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등 독재성향이 있었으나 경제적 성과로 상쇄할 수 있다는 흐름을 보였다.
대표적 공적에 대해선 나이가 적을수록(20대 68·6%, 50대 이상 51·9%) 경제성장에 점수를 매겼으며 고속도로건설은 나이가 많을수록 후하게 봤다.
이른바 10월 유신에 대해선「불필요한 조치였다」(33·2%)는 부정적 시각보다「잘 모르겠다」가 40·4%로 더 많아 이채로웠다.「필요한 조치였다」는 대답도 26%나 나았다.
유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유보하려는 경향이 우세한 것 아닌가 짐작된다.
10·26이 없었다면「박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집권했을 것」이냐는 물음에는「그렇다」는 답변이 34·8%이었으며 생전에 은퇴했을 것이라는 답변이 더 높은 38·3%로 나타났다. 사실상 종신집권체제인 유신체제에서도 박대통령이 중도에 정권을 내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다소 우세한 것이 신기하다.
남자(40·1%)가 여자(29·8%)보다 종신집권 쪽을 더 믿었다.
박대통령 집권 18년의 총체적 평가에 대해선 과반수(56·1%)가 역사의 성장전환기로 보았으며, 22·3%가 도약기로 받아들였다. 반면 침체기(7·5%) 후퇴기(2·3%)는 크게 떨어져 78·4%의 압도적 다수가 박정희 18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도약기로 본 사람은 50대 이상과 20대에 다소 많았다.
역대국가통치자 5명중(노태우 현 대통령은 제외)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박대통령은 63·1%의 몰 표를 얻어 그 다음인 이승만 초대대통령(9·1%)과 엄청난 차이를 기록했다.
2공화국의 장면 국무총리는 3·8%이었고, 전두환(0·8%)·최규하(0·7%) 전직대통령은 1%도 채우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20·2%는 훌륭한 지도자가 없다고 응답했다.
반대로 가장 잘못한 지도자엔 전 전대통령이 63·1%로 제일 높았고 박대통령이 가장 적은 1·8%이었다. 이승만(8·2%)·최규하(4·1%)·장면(2·2%) 씨 순서였다.
박대통령의 긍정평가는 30∼40대에서 70%를 넘었고 20대에서 가장 낮은 55·4%이었다.
박대통령에 대해선 전남·광주(49·4%) 전북(42%)에서도 긍정평가가 꽤 높았으나 최악의 지도자로 뽑힌 전 전대통령에 대해선 광주·전남(80·8%) 전북(72%)에서 인기가 바닥을 헤맸다.
◇조사방법=행정구역 및 도시화 정도별로 전국 20세 이상을 상대로 전화번호부에서 체계적(등 간격)으로 1천 가구를 추출한 뒤 한 가구에 1명씩 선정, 전화인터뷰로 했다.
대상자는 남자 5백2명, 여자 4백98명이며 국졸 1백69명, 중졸 1백72명, 고졸 3백99명, 대졸 이상 2백7명, 대학생 53명. 오차는 95% 신뢰도를 기준으로 ±3·1%.<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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