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절 분위기 깨지 말라"…시진핑 코로나 책임론 키운 한마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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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분위기를 해치지 말라”는 중국 중앙 지도자의 말 한마디가 신종 코로나 감염증(코로나 19) 대응 부실을 불렀다는 홍콩 언론의 보도가 나와 주목된다. 중앙 지도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신종 코로나 감염 환자 잇따르던 1월 초 #중국 전문가는 호흡기 전파 위험성 경고 #그러나 시진핑 주재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예방은 하되 춘절 분위기 깨지 말라” 지시 #이 한마디가 초기 부실 대응으로 이어지면서 #수천 명이 사망하는 우한 비극 부르고 있어

신종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중국 곳곳의 방역 작업이 강화되고 있다. [중국 인민망 캡처]

신종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중국 곳곳의 방역 작업이 강화되고 있다. [중국 인민망 캡처]

홍콩 명보(明報)는 17일 ‘중국 질병통제센터가 일찍이 보고했으나 중앙이 명절 기분을 지키려다 기회를 놓쳤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중국 당국이 어떻게 신종 코로나 대응에 실패하게 됐는지 과정을 상세하게 전했다.

지난해 12월 말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 환자가 발생하자 중국 질병통제센터가 바로 개입했다.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 소속의 전문가팀이 12월 31일 우한으로 달려가 조사에 착수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을 찾아내기 위한 검사 작업이 세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 인민망 캡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을 찾아내기 위한 검사 작업이 세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 인민망 캡처]

그 결과를 토대로 1월 5일 우한 위생건강위원회는 원인 불명의 폐렴 사례 59건을 보고하며 사람 간 전염의 명확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6일 가오푸(高福) 질병통제센터 주임은 중국의 예방 경계 태세를 2급으로 올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명보에 따르면 당시 중국 질병통제센터는 국가위생건강위원회 등 중앙 부처와 중앙 지도부에 위험을 고지했다고 한다. 원인 불명의 폐렴이 호흡기 기관을 통해 전파될 위험이 크므로 공공장소를 포함한 각 곳에서 마땅한 대응 조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오푸 중국질병통제센터 주임은 지난 1월 초 신종 코로나의 위험성을 일찍 경고하긴 했으나 과연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느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중국망 캡처]

가오푸 중국질병통제센터 주임은 지난 1월 초 신종 코로나의 위험성을 일찍 경고하긴 했으나 과연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느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중국망 캡처]

그러나 이 같은 건의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며 우한 비극을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튿날인 7일 시진핑 주석이 주재하는 중국 지도부의 최고 회의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가 열렸으나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은 것이다.

신종 코로나 사안 자체가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의 중점 사항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중앙 지도자는 원인 불명의 폐렴과 관련해 “예방과 통제에 주의를 기울이되 그로 인해 지나치게 공포심을 일으켜 다가오는 춘절(春節, 설) 분위기를 해치지 말라”고 지시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신종 코로나 사태 발생 직후인 지난 1월 7일 이미 "잘 대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중국 언론이 밝히면서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밖에 대처를 못했냐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신종 코로나 사태 발생 직후인 지난 1월 7일 이미 "잘 대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중국 언론이 밝히면서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밖에 대처를 못했냐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중앙 지도자는 시 주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지난 15일 나온 중국 공산당 이론지 치우스(求是)에 따르면 시 주석이 1월 7일 열린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신종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 잘 대처하라는 지시를 이미 내렸다고 밝혔다고 한다.

치우스 잡지는 시 주석이 사태 초기부터 관심을 갖고 대응에 나섰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으나 오히려 시 주석이 일찍부터 신종 코로나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사는 결과를 초래했다.

리커창 총리는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존재감이 약했으나 신종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선 영도 소조의 조장을 맡아 분투하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리커창 총리는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존재감이 약했으나 신종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선 영도 소조의 조장을 맡아 분투하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이처럼 명절 분위기를 해치지 말라는 중앙 지도자의 말 한마디가 이후 부실한 후베이성과 우한시 정부의 부실한 대응으로 이어졌다. 이미 사람 간 전염이 이뤄지고 있는데도 우한시와 후베이성 인민대표대회가 각각 개최됐다.

급기야 우한시가 18일에는 4만여 가정을 초대하는 만가연(萬家宴) 잔치를 열기에 이른 것이다. 명보는 가오푸 주임도 경고는 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중앙 및 지방 지도부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보도했다.

그렇기에 가오푸가 주임으로 있는 질병통제센터가 우한의 폐렴 케이스를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는 걸 중앙 정부가 허락했다는 것이다. 중국 내 전염병 문제와 관련해 이를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려면 중앙 정부의 허락은 필수적이다.

신종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는 후베이성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 동원이 늘고 있다. [중국 환구망 캡처]

신종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는 후베이성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 동원이 늘고 있다. [중국 환구망 캡처]

시 주석 등 중국 지도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 1월 20일이 돼서다. 중국 호흡기 질병의 권위자인 중난산(鍾南山)의 입을 빌려 “사람 간 전염이 있다”는 말로 중국 사회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명보는 중난산의 발언 역시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가오푸 등 전문가와 상의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사태를 완전히 다르게 보는 견해를 개인이 마음대로 밝힐 수 있는 중국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날 시 주석 역시 신종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 “고도로 중시하며 전력을 다해 저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시 주석은 23일의 우한 봉쇄를 자신이 지시했다고 밝히면서도 23일 있었던 춘절 인사에선 단 한마디도 우한이나 신종 코로나를 언급하지 않았다.

2월 중순 이후 업무로 복귀하기 위해 대도시로 향하는 중국인 발걸음이 많아지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2월 중순 이후 업무로 복귀하기 위해 대도시로 향하는 중국인 발걸음이 많아지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명절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 했던 의지가 읽힌다. 명보는 사태 악화 후 중국 각 부문이 서로 책임을 미루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전문가 집단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대처 기조를 정한 권력 고위층의 지시가 더 큰 문제였다고 말했다.

춘절이라는 최대 명절을 맞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안이한 인식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을 불렀다는 이야기다. 시진핑 주석의 책임론이 갈수록 확산하는 추세여서 시 주석이 과연 이를 어떻게 수습할지 주목된다.

중국 신종 코로나 확진·사망자 추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중국 신종 코로나 확진·사망자 추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사망자 수.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사망자 수.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한편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는 지난 16일 하루 동안 전국의 신종 코로나 확진자가 2048명 늘었으며 사망자는 105명 증가했다고 17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16일까지 중국 내 누적 확진자는 7만 548명, 사망자는 1770명이 됐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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