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툭 하면 기업에 손벌리는 정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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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대통령배 e스포츠 대회를 연다며 관련 업체들에 3억~5억원씩의 협찬금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정청래 의원이 회장으로 33명의 의원들이 참여한 'e스포츠와 게임산업 발전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이다.

네트워크 게임을 이용한 각종 대회나 리그를 가리키는 e스포츠는 IT강국 한국을 상징하는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를 국회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야 고무할 일이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그 행태나 발상이 아직도 과거 정치권의 낡은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의를 빚게 되자 실무자의 책임이라고 변명하고는 협찬 요청을 계속하겠다고 하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 아닌가.

가장 큰 문제는 툭하면 기업에 손을 벌리는 정치권의 행태다. 참여정부 3년 동안 정부가 거둬들인 준조세가 21% 늘어났다고 한다. 지난해 32개 부처.기관이 준조세로 거둬들인 돈이 58조5382억원으로 국세의 절반에 이르는 형편이다. 여기에 1월 4일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5단체장에게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공헌을 요구한 이후 기업들이 줄줄이 사회공헌기금을 내놓고, 심지어 론스타 같은 외국기업까지 흉내를 내는 지경이다. 그런데도 정치인들까지 이벤트를 만들어 기업들에 손을 벌리니 이러고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말을 할 낯이 있겠는가.

의원들이 직접 협찬금까지 거둬가며 대회를 열겠다는 발상도 문제다. 말이 '협찬'이지 집권당 의원 수십 명이 참여한 모임에서 공문을 보내는데 압력으로 느끼지 않을 기업이 어디에 있겠는가. e스포츠는 이미 민간 자율로 상당한 터전을 잡았다. 2000년 e스포츠협회가 창립된 이후 프로게이머를 보유한 대기업의 게임단도 구성되고, 전국 규모의 대회도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 게임 전용 케이블과 위성 방송국도 여러 곳이다. 이렇게 건전하게 발전하고 있는 민간대회를 굳이 정치권이 주도해 통합하겠다는 이유가 뭔가. 신세대의 환심을 사보려는 얄팍한 정략적 발상이라면 일찌감치 접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