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15. 풍류객 백홍열<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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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열린 '대륙의 술꾼' 김태선 추모의 밤. 김태선도 풍류객 백홍열을 존경했다.

백홍열 선생의 집안은 무척 가난했다. 그런 그가 공부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여기에 각박한 오늘과, 푸근했던 옛날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의 서울 진학(휘문고)과 동경 유학에는 지역 유지들의 도움이 꽤나 컸다고 한다. 고향인 황해도 은율의 부자들은 그의 사람됨을 보고 학비를 지원해줬다.

문제는 대학 2학년 때 일어났다. 청년 백홍열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기껏 공부해 일본놈 하인 노릇을 할 것이라면 고향의 인재들에게 '향토 장학금'을 나눠주고 자신은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천하를 주유하며 살았는데, 흥미롭게도 그 장학금에 힘입어 거물 몇 명이 탄생했다.

4.19 직후 초대 민선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돈, 동국대 총장을 역임했던 김법린 선생이 그들이다. 어쨌거나 백홍열 선생에게는 일화가 수두룩하다. 일제하 기자생활 때의 촌지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에게 거액의 촌지를 건네준 이는 당시 큰 부자였던 광산주라고 한다. 그 돈을 챙긴 백홍열은 기자직부터 접었다.

"일본놈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에서란다. 그러고는 고향 은율로 내려가 절 한 칸을 덜렁 지었다. 낙성법회 때에는 소 한 마리 잡아 마을잔치까지 벌였다니 정말 엉뚱했다. 그렇게 촌지를 다 쓴 뒤 곧바로 한량생활에 들어갔다.

이런 일화도 있다. 한국전쟁 때 세 아들 중 둘이 국군.인민군으로 갈라졌다. 국군으로 나갔던 둘째가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가 휴가 나와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계신 북쪽을 향해 총을 쏠 수 없다"고 털어놨다. 아침식사 때였다. 아버지 백홍열은 그에게 죽사발을 냅다 던졌다.

"이 녀석, 이왕 총을 들었다면 전쟁을 일으킨 놈들부터 요절내야지!"

복귀한 아들은 며칠 뒤 장렬하게 산화했다. 비극은 그치지 않았다. 인민군으로 나갔던 큰아들이 1957년 남파 간첩이 돼 서울로 그를 찾아왔다. 마침 경찰이 급습했지만 백홍열은 눈 하나 꿈쩍 않았다. 당당하게 일장 연설부터 했고 오히려 출동했던 경찰들이 쩔쩔맸다고 한다.

"이봐, 저 아이가 내 맏아들이야. 아버지에 효도하러 온 거라구. 뭐? 간첩? 북에서 살려면 그쪽에 충성하는 건 당연한거야."

그의 맏아들은 10년을 감방에서 살아야 했다. 백홍열 선생은 그 얘기 끝에 나를 붙잡고 엉엉 우셨다. 나도 울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마음 속에 자식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애틋함이 가득한 건 여느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백홍열 선생은 내 마음의 영웅이다. 이 지면에 그의 사람됨과 풍류를 모두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 큰 그릇이 우리 곁을 바람처럼 스쳐갔다는 사실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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