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열린 '대륙의 술꾼' 김태선 추모의 밤. 김태선도 풍류객 백홍열을 존경했다.
문제는 대학 2학년 때 일어났다. 청년 백홍열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기껏 공부해 일본놈 하인 노릇을 할 것이라면 고향의 인재들에게 '향토 장학금'을 나눠주고 자신은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천하를 주유하며 살았는데, 흥미롭게도 그 장학금에 힘입어 거물 몇 명이 탄생했다.
4.19 직후 초대 민선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돈, 동국대 총장을 역임했던 김법린 선생이 그들이다. 어쨌거나 백홍열 선생에게는 일화가 수두룩하다. 일제하 기자생활 때의 촌지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에게 거액의 촌지를 건네준 이는 당시 큰 부자였던 광산주라고 한다. 그 돈을 챙긴 백홍열은 기자직부터 접었다.
"일본놈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에서란다. 그러고는 고향 은율로 내려가 절 한 칸을 덜렁 지었다. 낙성법회 때에는 소 한 마리 잡아 마을잔치까지 벌였다니 정말 엉뚱했다. 그렇게 촌지를 다 쓴 뒤 곧바로 한량생활에 들어갔다.
이런 일화도 있다. 한국전쟁 때 세 아들 중 둘이 국군.인민군으로 갈라졌다. 국군으로 나갔던 둘째가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가 휴가 나와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계신 북쪽을 향해 총을 쏠 수 없다"고 털어놨다. 아침식사 때였다. 아버지 백홍열은 그에게 죽사발을 냅다 던졌다.
"이 녀석, 이왕 총을 들었다면 전쟁을 일으킨 놈들부터 요절내야지!"
복귀한 아들은 며칠 뒤 장렬하게 산화했다. 비극은 그치지 않았다. 인민군으로 나갔던 큰아들이 1957년 남파 간첩이 돼 서울로 그를 찾아왔다. 마침 경찰이 급습했지만 백홍열은 눈 하나 꿈쩍 않았다. 당당하게 일장 연설부터 했고 오히려 출동했던 경찰들이 쩔쩔맸다고 한다.
"이봐, 저 아이가 내 맏아들이야. 아버지에 효도하러 온 거라구. 뭐? 간첩? 북에서 살려면 그쪽에 충성하는 건 당연한거야."
그의 맏아들은 10년을 감방에서 살아야 했다. 백홍열 선생은 그 얘기 끝에 나를 붙잡고 엉엉 우셨다. 나도 울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마음 속에 자식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애틋함이 가득한 건 여느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백홍열 선생은 내 마음의 영웅이다. 이 지면에 그의 사람됨과 풍류를 모두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 큰 그릇이 우리 곁을 바람처럼 스쳐갔다는 사실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배추 방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