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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로비스트 그리고 골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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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딜레이는 골프광이다. 그를 몰락시킨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였던 로비스트 잭 아브라모프(47)다. 두 사람의 친분을 돈독히 해준 중요한 매개체는 골프였고, 두 사람의 공멸을 초래한 계기의 하나도 호화 골프여행이었다. 아브라모프는 2000년 딜레이 부부를 영국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으로 초청했다. 세인트앤드루스는 골프의 발상지이자 세계 골프 룰을 정하는 골퍼의 성지(聖地). 골퍼에겐 꿈의 구장이다. 7만 달러(약 7000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딜레이가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난 것은 지난해 9월이다. 아브라모프와 연루된 정치자금 관련 의혹이 제기되던 가운데 호화 골프여행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딜레이는 당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잠시 대표직을 물러난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비용은 내가 냈고, 나머지는 후원단체가 부담했다"고 말했다. 거짓말로 드러났다. 아브라모프가 냈다. 딜레이는 올해 초 "아브라모프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이라며 5만7000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검찰의 조사를 받던 아브라모프가 플리바겐(Plea Bargain)에 나서자 부시 대통령과 다른 의원들도 일제히 그로부터 받은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플리바겐은 범죄 혐의자가 형량을 낮추기 위해 유죄를 인정하고 검찰의 수사에 협조하는 제도다.

아브라모프는 미국의 최고 거물 로비스트다. 정상회담도 그의 주선으로 이뤄질 정도다. 지난달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2002년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을 성사시킨 대가로 아브라모프에게 120만 달러를 주었다"고 밝혔다. 영향력은 공화당 실세들과의 친분에서 나왔다. 그중에서도 딜레이와 가장 가까웠다. 고급 골프장에서 자주 어울렸다. 아브라모프는 배니티페어 4월호 인터뷰에서 "딜레이와 만나면 골프나 오페라나 성경, 말하자면 철학과 정치를 논했다. 특정 사안을 로비하기 위해 딜레이와 그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골프는 사교에 매우 효율적인 운동이다. 정치인과 로비스트에겐 더할 수 없이 긴요하다. 골프라는 운동이 자랑하는 접근성과 기밀성 때문이다. 평소 10분 만나기도 힘든 정치인과 골프를 같이하면 최소한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광활한 필드에서 나누는 대화는 어느 누구도 엿듣지 못한다. 고급 골프장일수록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브라모프의 말처럼 철학을 논하더라도 친해지게 마련이다.

이해찬 총리도 골프광으로 알려졌다. 건강을 위해 뒤늦게 배운 운동에 열심인 것을 탓할 수는 없다. 3.1절 골프가 문제가 된 것은 그가 현 정권의 2인자이고, 그에게 로비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과 골프를 쳤고, 그 비용을 자신이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모프는 사건 초기 언론의 비판이 쏟아지자 "카프캐스크(Kafkaesque)"라고 항변했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뭔가 애매모호하면서도 불길한 음모의 냄새가 풍긴다는 주장이다. 총리와 그의 골프 동반자들도 내심 이런 항변을 하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의혹이 커져 가면서 국민이 더 답답한 상황이다. 플리바겐은 아니더라도 당사자들이 스스로 진상을 밝히는 것이 유일한 해법일 듯하다.

오병상 문화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