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라인 넘었다는 北, 깨진 '쌍중단', 흔들리는 文 '평창 큰그림’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스리랑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도발과 관련, "한반도를 긴장시키고 국제 평화와 안정을 중대히 위협하는 북한의 무모한 도발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유엔 안보리 결의를 끝까지 강력히 이행하고 단호히 대응할 수 있게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스리랑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도발과 관련, "한반도를 긴장시키고 국제 평화와 안정을 중대히 위협하는 북한의 무모한 도발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유엔 안보리 결의를 끝까지 강력히 이행하고 단호히 대응할 수 있게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평창 겨울올림픽을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창 구상’에는 전제가 있었다. 북한의 고강도 도발로 인한 긴장 국면이 조성되지 않아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29일 북한의 탄도미사일 ‘화성-15형’ 발사는 이런 전제 자체를 깨뜨렸다. 정부의 평창 구상도 수정이 필요할 전망이다.

북한은 75일 동안 도발을 멈추며 이유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의 특사를 접수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면서 기대감을 키우기도 했다.

북한의 도발 중단이 이어지고,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문제로 수렁에 빠졌던 한·중 관계가 회복 기미를 보이면서 문 대통령의 평창 구상도 힘을 받는 듯 했다. 학계를 중심으로 중국이 제안했던 쌍중단(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동시에 잠정 중단)도 다시 부각됐다.

의도와 상관없이 북한이 도발을 계속 하지 않을 경우 한·미 연합훈련만 연기하면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결과적 쌍중단’이 가능해지고, 이를 계기로 남북 대화를 시도해볼 만 하다는 논리였다. 실제 정부는 유엔에서 채택된 ‘휴전결의안’을 근거로 한·미 연합훈련의 일정을 조정,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훈련을 일시 중단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었다.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방한 중이던 27일 “북한에 이미 쌍중단을 제안했으며, 지난 9~10월 2개월 간 (사실상)그 체제 안에서 행동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북한이 29일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형'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화성-15형 미사일 발사 친필 명령. [연합뉴스]

북한이 29일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형'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화성-15형 미사일 발사 친필 명령. [연합뉴스]

하지만 북한은 이런 국제사회의 기대를 비웃듯 미국 워싱턴까지 사정거리 안에 넣는 화성-15형을 발사했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을 통해 화성-15형에 대해 “미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로켓”이라며 “우리가 목표한 로켓무기체계개발의 완결단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이 스스로 그은 레드라인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 무기화하는 것”(8월 기자회견)이었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레드라인을 이미 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어떻게 해서든 핵과 ICBM을 손에 쥔 뒤 대미협상력을 높인 상태에서 테이블에 앉겠다는 의도를 계획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내 분위기는 아직 평창 구상의 동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보는 기류가 강하다. 하지만 북한이 레드라인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상황에서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한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방점을 찍는 것은 국제사회의 대북 공조에서 이탈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평창 겨울올림픽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한두 달 내에 상황을 진전시키는 데 목을 매면 일은 더 꼬이게 돼 있다”며 “향후 일정 기간은 제재와 압박에 집중해서 북한의 전략적 계산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