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Behind & Beyond] 암 이긴 투수 원종현, 희망을 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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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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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1일 TV에서 본 장면이다.

한 투수가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마운드에 올랐다.

대장암을 극복하고 592일 만에 등판했다는 해설자의 설명이 따랐다.

그는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두 번째, 세 번째 타자도 삼진이었다.

그 후 더그아웃으로 뛰어 들어오던 그가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그의 뒤를 지켰던 야수들을 기다렸다.

592일 동안 모자에 숫자 155를 새기고 기다려준 동료, 일일이 손을 마주치며 맞이했다.

155는 예전 그가 던진 최고 구속을 의미하는 숫자였다.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라며 한마음으로 기다렸던 동료들에게

최고 구속 152㎞로 돌아온 게다.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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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인공이 NC 다이노스 투수 원종현이었다.

그에 대해 알아보려고 NC 구단 관계자에게 전화를 했다.

구단 관계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고등학교 시절엔 장래가 꽤 유망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프로에 와서 제구가

들쭉날쭉하더니 급기야 부상으로 방출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다 NC에 테스트를 받고

어렵사리 입단했습니다. 그 고생을 해서 겨우 자리를 잡았죠.

155㎞를 던지며 한창 꽃피울 즈음에 안타깝게도 대장암이 발병한 겁니다.”

이제 서른 줄에 접어든 젊은 야구선수가 겪은 삶, 파란만장했다.

모자를 삐딱하게 쓴 이유를 물어봤다.

“내성적인 데다 워낙 성격이 순해서 김상엽 코치가 제안했다고 하더라고요.

마운드 위에서 당당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리 제안했답니다.”

의외의 답이었다.

마운드에서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타자를 노려보던 눈빛이

순둥이를 감추기 위한 방편이라는 얘기였다.

그날 이후 NC가 계속 승리를 했다.

10연승을 하는 날,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서 있던 투수가 원종현이었다.

구단 관계자에게 원 선수의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시즌 중에 시간을 빼는 것은 쉽지 않다는 답이 왔다.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되면 가능한지 물었다.

비가 온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 수요일, 마침 비가 왔다.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는 구단의 답이 왔다.

잠실야구장으로 향했다.

빗속에서도 캐치볼로 몸을 푸는 원 선수의 모습이 보였다.

먼발치였지만 삐딱하게 쓴 모자로 인해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경기가 취소됐어도 정해진 만큼의 훈련을 마친 후에야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그가 모자를 벗었다.

그 순간 비 오는 야구장을 바라보며 웃는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흐뭇한 웃음을 머금은 순박한 표정이었다.

고작 모자 하나 벗었을 뿐인데 사람이 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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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밖에 모르고 살다가 꿈을 이룰 수 있겠다 싶을 때 병이 나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수술과 12차례의 항암 치료에 머리가 빠지고 구토를 하면서도

어떻게든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이 말을 하면서 그의 시선은 야구장을 향해 있었다.

아직 155㎞에 이르지 못했지만 돌아온 자신을 대견해하는 흐뭇한 표정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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