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국정원 직원, 대북공작 대상 명단 삭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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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프로그램 구입과 관련된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국정원 직원 임모씨의 유서 3장 중 1장이 19일 용인동부경찰서에서 공개됐다. 임씨는 유서에서 “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유서의 나머지 2장은 가족에게 남겼다. [강정현 기자]

국가정보원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 및 불법 사찰 의혹과 관련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정원 직원 임모(45·4급 과장)씨의 유서를 경기도 용인동부경찰서가 19일 공개했다. 임씨는 지난 18일 낮 12시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한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임씨가 타고 있던 마티즈 승용차 안에는 완전히 탄 번개탄이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19일 오후 부검을 한 뒤 임씨의 사인을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질식사로 확인된다”고 발표했다.

 임씨는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해킹 의혹과 관련해 국정원 관계자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 지나친 업무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하다”고 적었다. 특히 “외부에 대한 파장보다 국정원의 위상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혹시나 대테러·대북공작 활동에 오해를 일으킬, 지원했던 자료를 삭제했다”며 “저의 부족한 판단이 저지른 실수”라고 밝혔다.

 임씨가 삭제한 자료들에 대해 여권의 핵심 관계자는 “대북공작 대상자들의 이름 등이 적힌 자료들”이라며 “임씨가 이번 사태가 불거진 뒤 삭제했다가, 지난 17일 국정원 측이 관련 사실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하자 뒤늦게 삭제한 사실이 드러날까 걱정해왔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19일 오후 낸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보도자료에서 임씨를 “2012년 문제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을 실무 판단하고 주도한 사이버 전문 기술직원”이라며 “본인이 도입한 프로그램이 민간인 사찰용으로 사용됐다는 정치권과 일부 언론의 매도에 분노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 “사이버 작전은 노출되면 외교 문제로도 비화될 수 있어 국가안보를 지키는 데 꼭 필요한 대상으로만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은 임씨의 자살에 대해선 “국정원의 공작내용이 노출될 것을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국정원은 현재 그가 무엇을 삭제했는지 복구작업 중에 있다.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원들의 (현장) 방문 시 필요한 기록을 공개해 민간인 사찰을 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이날 밤 임씨의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했다고 국정원 관계자들이 전했다.

 임씨의 자살과 관련해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정치권이 국정원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임씨가 숨져 안타깝다”며 “정치권이 국정원 관련 이슈만 불거지면 의혹부터 제기하는데 사실관계 확인부터 하는 게 순서”라고 주장했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 위원장은 “국정원 불법 해킹·사찰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관련 직원의 돌연한 죽음으로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은혜 대변인은 "공개된 유서로 불법 사찰 의혹은 더 커졌다”고 주장했다.

 여야는 20일 오후 양당 원내수석부대표·국회 정보위 간사 합동회의를 열어 국정원 현장방문 일정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글=김성탁·정종문 기자, 용인=박수철 기자 sunty@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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