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1435조원 풀지만, 헛물켠 그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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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유럽의 고집이 디플레이션 공포에 꺾였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2일(이하 현지시간) ECB와 각국 중앙은행이 3월부터 내년 9월까지 매달 총 600억 유로 규모의 채권을 매입하는 미국식 양적완화(QE)를 추진한다고 밝히자 나온 시장의 반응이다. 19개월간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국)에 풀리는 돈은 총 1조1400억 유로(약1435조원)다. 국채와 회사채, 자산유동화증권(ABS) 등을 사들이며 돈을 풀게 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3일 “양적완화를 거부하던 ECB가 경기 부양을 위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드라기의 ‘머니 바주카포(양적완화)’에 채권과 주식 시장은 환호했다. 미국의 10년·30년 만기 국채와 유럽 국채 가격은 모두 올랐다. 미국 뉴욕 다우 지수는 22일 전날보다 1.48% 상승했다. 23일(한국시간 오후 9시 현재) 독일(1.66%)과 프랑스(2.02%) 등 주요 유럽 증시도 올랐다. 코스피(0.79%)와 일본 닛케이 지수(1.05%)도 오름세로 장을 마쳤다. 반면 유로화 가치는 급락했다. 22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1.1362달러에 거래됐다. 전 거래일(1.1588달러)보다 2.1% 떨어졌다.

 드라기는 양적완화 카드를 통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유럽 경제를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천명했지만 양적완화의 실질 효과에 대한 회의론도 제기되고 있다. WSJ는 “나라별로 상황이 다른 만큼 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국채 매입 방식도 문제로 지적된다. ECB는 지분에 따라 국채를 사들인다. 독일(17.9%), 프랑스(14.1%), 이탈리아(12.3%) 등 ECB 지분이 많은 나라의 국채를 더 살 수밖에 없다. 반면에 24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은 그리스는 ECB 지분(2%)이 낮아 별로 득을 볼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드라기 총재가 “그리스 국채는 7월부터 매입할 것”이라고 밝혀 당장 양적완화의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오히려 독일 국채 등에 수요가 몰리면 거품이 낄 우려도 나온다. 독일 은행연합회의 미하엘 케머 회장은 “양적완화 효과는 제한적이지만 자산 거품 확대와 금융 리스크가 커질 위험도 높아졌다”고 경고했다.

 국채 매입에 따른 손실 부담도 논란을 낳고 있다. ECB에 따르면 국채를 매입한 뒤 손실이 발생하면 각국 중앙은행이 손실분 80%를 떠안는다. 로이터통신은 “손실 부담 구조로 인해 부채 비율이 높은 국가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고 이는 유로존의 결속에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통화 전쟁이 본격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들은 투기 자금 유입에 대비하고 있다. 스위스가 지난 5일 선제적으로 환율하한선을 폐지했고 덴마크 중앙은행은 지난 한 주 동안 두 차례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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