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구공이 여 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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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나는 절구와 절구공이로 이 선거에서 이기겠다』
이것은 7년 전 「반다라나이케」가 선거 연설때 한 소리다. 「실론」의 주식은 「카레·라이스」인데, 그 당시 「카레」에 들어가는 파와 고추가 품귀했고 야자값이 비쌌다. 그래서 절구와 절구공이를 고추빻는데도 못 쓸 바에야 그것으로 정권이나 쥐겠단 이야기다. 「반다라나이케」는 그때 과부 당수였다. 자유당 당수이던 남편이 비명에 죽자 그 유지를 이으려고 선거에 출마한 것이다. 「절구공이」가 어떻게 쓰여졌던지, 그녀는 두 번째로 인도양상의 현대판 『「시바」의 여왕』이 될 수 있었다. 자유당·평등당·공산당간의 좌파연정이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인디라·간디」와 더불어 비동맹과 사회주의의 「심벌·마크」로 통했다. 72년엔 국호도 「스리랑카」로 개칭했다. 「실론」이란 식민시대의 유물이란 것이다.
그녀의 비동맹은 자연히 미국의 「아시아」정책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디에고가르샤」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하자 그녀는 대뜸 인도양을 「평화지대화」하자고 맞섰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극좌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71년에 극좌청년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그녀는「법과 질서」의 「절구공이」를 아끼지 않았다. 배후에서 선동하는 북괴 공관원도 가차없이 추방했다.
그러나 그녀의 집권 7년은 경제불황에서 「워털루」를 만난 셈이다. 공업화계획을 잔뜩 벌여놓긴 했는데 원자재도입이 문제였다. 홍다와 고무·야자를 팔아 외자를 충당했으나 그 국제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변덕을 부렸다. 그 덕택에 늘어난 것은 외채와 실업자였다. 식량과 필수품이 품귀해지고 기업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자 「반다라나이케」를 지지하던 청년층과 여성층도 덩달아 등을 돌렸다. 총유권자 6백20만명 중 24%가 불만청년이고, 18%가 25∼30세의 준불만층이었다.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는 이들은 좌파연정의 극좌부분을 「반정부」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트로츠키」주의자인 평등당과 공산당이 떨어져 나가 따로 「사회주의통일전선」이란 것을 만든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엔 「자예와르데네」의 통일국민당이 「7년만의 복귀」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면초가에 겹쳐 그녀의 아들 「아누라」는 족벌정치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 표를 잃을만한 조건들이 성숙한 셈이다. 통일국민당의 새로운 「스리랑카」는 인도의 신정권과 비슷한 우경중도정치를 지향할 듯 하다. 모처럼 주인을 바꾼 「절구공이」가 고추를 얼마나 잘 찧을진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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