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는 절박하게 여자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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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형경
소설가

화사한 봄날, 꽃단장 한 할머니 두 분이 경쾌한 걸음으로 길을 가고 있었다. 우연히 보조가 맞았던 까닭에 곁에서 걷는 내게 그분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렇게 마음껏 외출하니 얼마나 좋아.” “그러게, 늙으면 돈 있고 영감 없는 게 제일이야.” 그분들은 기분 좋은 웃음을 나누었다. 웃음소리에는 평생 남편의 필요와 욕구를 해결해주면서 살았던 삶에서 벗어난 해방감 같은 것이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귀가했을 때 아내가 집에 없으면 불안한 마음으로 향방을 묻는다. 가끔 불같이 화부터 내는 이도 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남자들은 일상생활의 많은 요소들을 아내에게 의존한다. 식사와 옷차림, 잠자리와 자녀 양육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일상생활뿐 아니라 감정 표현의 문제에서도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한다. 남자는 사회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나, 경쟁관계에 있는 남자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속내를 여자에게 토로한다.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도 여자가 말하는 감정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간접적인 내면 표출의 기회를 얻는다. 여자는 남자가 배신당할 염려 없이 감정과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안식처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증명받는다. 남자다움, 자기존중감 등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자가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자가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 감사의 말을 전할 때, “멋지다!”고 감탄할 때 남자는 기분이 하늘로 날아올라 별이라도 따줄 기세가 된다.

 다양한 면에서 여자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남자는 둘 중 한 가지 태도를 취한다. 여자에게 잘 맞춰주고 여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거나, 여자를 억압하고 통제함으로써 자기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절박하게 의존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박탈당할까봐 불안해하는 마음이 큰 것도 당연하다. 최근에는 한 젊은 남자의 탄식을 들은 일이 있다.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저리도 많은데, 그중에 내 여자 하나 없다니….”

 세계보건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제때에 식사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오해한 경우, 여자가 복종하지 않고 남자와 논쟁을 벌였을 때, 아내가 섹스를 거부할 때 등이다. 한마디로 아내에 대한 의존 욕구가 좌절당했을 때이다. 그것은 학교 갔다 귀가했을 때 엄마가 집에 없으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