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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립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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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도은
중앙SUNDAY 기자

지난주 서울패션위크 쇼장을 찾았다가 기이한 경험을 했다. 쇼 마지막에 모델들이 한꺼번에 나와 런웨이를 한 바퀴 돌고 들어가는 순간, 보통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와야 정상인데 어쩐지 조용했다. 평소 호평 받는 디자이너의 패션쇼였기에 썰렁함이 웬일인가 싶었다. 원인은 휴대전화 카메라. 옆이고 뒤고 둘러보니 모두가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마지막 모델 워킹을 찍는 통에 박수를 칠 만한 두 손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침묵 속의 피날레였다.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촬영 본능’에 놀란 적이 있다. 고(故) 최인호 작가의 장례미사가 열렸던 명동성당 안에서였다. 미사 말미에 고별예식을 마치고 관이 바깥으로 옮겨지는 순서. 앞자리 중년 여성이 휴대전화를 가방 속에서 꺼내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연신 흐르면서도 손은 카메라를 켜고 관 쪽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로 분주했다.

 예전엔 만인의 취미가 독서라 했건만 이제는 촬영이 아닐까 싶다. 휴대전화에 카메라가 달려 있으니 누구든 언제 어디서나 찍는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단순한 기록 목적이라기보단 공유의 용도가 강하다. 카카오스토리·페이스북·트위터에 각자의 일상을 올리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게 일상이 됐다. 어디 있든, 무얼 하든, 누구와 있든 사진을 찍지 않고는 못 배기는 촬영 중독이다. 더 화질 좋은 휴대전화가 나오고, 아예 보정까지 더해주는 애플리케이션이 만들어지는 건 그런 수요를 따라서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액정으로 들여다 본 사람, 장소, 물건이 과연 맨눈으로 본 것과 같을 수 있을까. 노래방 가사나 친구의 전화번호처럼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기억력을 상실하는 디지털 치매와는 다른 의미인데, 찰나의 스쳐가는 느낌과 감흥까지 기계가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그때의 기억이란 인생의 한 장면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요, 연출일 테니 말이다.

 번역가이자 소설가였던 고 이윤기씨의 과거 글을 모아 낸 신간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는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작가는 세상의 진리를 글로써 담으리라는 포부로 1995년 소설 『나비넥타이』 『숨은그림찾기』를 발표했지만 나중에 이것이 착각임을 알게 됐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말하자면 궁극의 무언가를 언어화시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믿었지만 실패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이를 ‘불립문자(不立文字, 지극한 진리는 말로써 전할 수 없다)’라는 사자성어로 표현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부닥치는 현실도 ‘불립촬영(不立撮影)’이다. 오감으로 느끼고, 머리로 기억하며 대상과 마주하는 일은 결코 카메라가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각도가 좋고 화질이 훌륭한들 모델의 희열이 느껴지는 섬세한 발걸음을, 망자와 이별하는 마지막 슬픈 순간을 담을 수 있을까. 더구나 남들에게 보여주려 내 감흥을 제쳐둬야 할, 다시보기를 위해 당장 지켜야 할 예의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이도은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