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주의자 DJ' 띄우는 민주당 지도부 … 등원 명분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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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지도부가 국회 등원의 명분으로 ‘DJ(김대중 전 대통령·얼굴)정신’을 꺼내들었다.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해 숱한 장외투쟁을 벌였지만 국회가 열릴 땐 절대 국회를 포기하지 않았던 DJ의 소신을 부각했다.

 23일 정기국회 참여를 선언한 김한길 대표는 전날까지 의원들을 만나 ‘DJ 정신’을 강조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DJ는 정기국회가 열리면 불시에 불 켜진 의원회관의 방으로 들어가 ‘아무개 의원 이번엔 뭘 준비하나’라며 꼼꼼히 챙겼다. 국정감사뿐 아니라 의원들이 다룰 지역 현안까지 꿰고 있었다”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23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기 위해 단상으로 향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이 자리에서 강도 높은 원내외 병행투쟁 계획을 발표했다. [김경빈 기자]

다른 관계자는 “김 대표가 의원들을 비공개로 만나 ‘DJ 정신’을 얘기하며 진짜 야성은 삭발하고 농성하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공부해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는 수권정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귀띔했다. DJ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의원도 “DJ는 의원회관에서 가장 늦게까지 일하며 국회 일정을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회고했다. 박 의원은 이날 민주당 의총에 앞서 “야당의 가장 강력한 투쟁 장소는 국회”라고 했다. 생전 DJ가 의원들을 독려할 때 자주 했던 말이다.

 민주당 지도부가 이처럼 DJ를 인용하고 나선 건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국회로 복귀한다는 비판론을 차단하는 동시에 향후 원내 투쟁을 독려하기 위한 이중 포석이다. 이런 기류는 지난 9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렸던 학술회의 때도 드러났다. 당시 김 대표는 축사에서 “어떤 경우에도 국회의원은 국회를 내쳐선 안 된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을 고수하고 있다”며 당내 강경파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국회 전면 보이콧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전병헌 원내대표도 이날 “2008년 민주당이 촛불집회에 전면적으로 나섰을 때 나는 원내외 병행투쟁을 주장했는데 소수파였다”며 “이런 주장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며칠 후 DJ로부터 ‘국회는 포기하면 안 된다. 정확한 지적을 했다’는 격려 전화가 왔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이들이 ‘DJ 정신’을 부각하는 배경엔 이들의 정계 입문과도 관계가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방송 진행자였던 김 대표는 1996년 DJ의 권유로 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에 입당해 국회의원이 됐다. 김 대표는 요즘 사석에서 “언젠가 일산 자택을 찾았는데 DJ가 다음날 TV 토론을 앞두고 빼곡하게 원고를 쓰고 계셨다. 그때 정치인은 자신의 말과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배웠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전 원내대표는 87년 김 전 대통령이 이끌던 평화민주당 당료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 때 “DJ에게서 정치를 배웠다”는 걸 부각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이날 의원총회에선 정기국회 참여를 결정한 지도부에 공개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의원들은 없었다. 의총을 마치고 나오던 이찬열 의원은 “대다수가 김 대표의 발언에 동조하는 분위기로 이견은 없었다”고 했다. 서영교 의원도 “(전면 장외투쟁으로 가자는 얘기는) 없었다”고 전했다.

글=이윤석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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