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271)거 창 사건(12)|후유증

    거창 사건은 군 재 결심과 함께 공식적으로는 일단 마무리됐지만 현지에서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정부는 주민처형의 책임을 물어 군 관련자를 처벌했지만 거창군 신원 면에 묻힌 「시한폭탄

    중앙일보

    1971.12.27 00:00

  • (263)|거창사건(4)|건벽청야 작전(4)|「6·25」21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

    당시의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청야」작명에 따라 거창군 신원면에 진주했을 때 가장 화를 많이 입은 곳이 대현리·와룡리·중유리, 그리고 덕산리의 청연부락이었다. 현지에서 유가족과

    중앙일보

    1971.12.07 00:00

  • (262)|거창사건(3)|「건벽청야」사건(3)

    거창사건에 직접 관련된 당시의 11사단9연대의 관계자증언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즉 연대장 오익경 대령과 3대대장 한동석 소령, 그리고 집단총살을 직접지휘한 3대대정보장교 이종대

    중앙일보

    1971.12.06 00:00

  • (261)「건벽청야」작전(2)

    (2) 문제의 「거창사건」은 1951년2월11일에 발생했다. 사단장의 「건벽청야」작전방침에 따라 이 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하던 9연대3대대가 거창군 신원면의 주민을 「통비분자

    중앙일보

    1971.12.03 00:00

  • 조용한 열전…축구선수 스카우트

    금년도 축구「스카우드」는 「올림픽」출전권상실과 금융계 경비절감이라는 파문으로 예년에 없이 조용한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선수는 많지만 꼭 필요한 선수는 많지 않다』고 「팀」 관계자

    중앙일보

    1971.11.25 00:00

  • 그 예기치 못했던 일들

    6일 동안 열전을 벌였던 전국체전은 27개 종목에 12개 시-도 대표 1만6천5백7명이 출전했던 만큼 예기치 못했던 이변이 많았다. 구기종목에서는 금년도 전국 5개 고교대회를 휩쓴

    중앙일보

    1971.10.14 00:00

  • 통일교육의 방향과 문제점

    통일이 민족적 희망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클로스업되면서 통일교육의 체계확립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통일교육의 방향과 문제점」이라는 주제로 이 문제를 취급한 크리스천·아

    중앙일보

    1971.09.28 00:00

  • (205)중공군 개입(4)|홍군의 실태(상)

    정권수립후 불과 1년만에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성장과정을 대충 살펴보고 실제로 그들의 실태와 전투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관계 증인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중공군이 처음으로 탄생

    중앙일보

    1971.07.23 00:00

  • (192)-(8)「6·25」20주… 3천 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5) 평양공격은 「프랭크·밀번」소장의 미 제1군단의 작전담당이어서 그 군단소속의 미 제1기 병사, 한국군 제1사, 미 제24사, 영국군 제27여단이 각각 1번 입성의 진격경쟁을

    중앙일보

    1971.06.23 00:00

  • (173)낙동강아 잘있거라(5)

    (하) 괴뢰군이 38선을 넘어 낙동강 교두보 일대에 도달하여 공격을 개시하기까지는 약 한 달이 걸렸다. 즉 수도서울은 3일만에, 대전은 20일만에 각각 점령했지만 그들이 낙동강에

    중앙일보

    1971.05.10 00:00

  • (155)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학도 의용병⑫|학도 포병대

    포병대는 각 병과 중에서도 두뇌와 체격이 우수한 병원을 골라서 편성하는 것이 통례이다. 학도의용병들이 어느 병과보다도 포병에 대거 입대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앙일보

    1971.03.26 00:00

  • (146)명의 부대(하)-학도의용병(3)

    9월14일의 장사동 상륙 작전을 효시로 하여 지촌리과 당림리의 격전을 거쳐 12월19일에 한성여중에서 부대가 해체되기까지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의 자초지종을 관계자들로부터

    중앙일보

    1971.03.05 00:00

  • (136) 대구 사수 (4)|낙동강 공방전 (18)|6·25 20주…3천여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교두보에서 북괴군과 일진일퇴의 혈전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교두 보안의 후방 지역은 어떤 상태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선과 후방은 함수 관계에 있기 때문

    중앙일보

    1971.02.10 00:00

  • (87)-국군의 전선정비(11)

    (하) 미8군사령부에서 안동철수를 급히 서둘러 하명한데는 그럴만한 다급한 이유가 있었다. 여러 자료와 기록을 종합 검토해 보면, 한국전쟁에서 중공군 개입 전에 유엔군의 직면한 진짜

    중앙일보

    1970.10.19 00:00

  • (86)국군의 전선정비(10)

    안동철수작전의 실패는 전회에서도 좀 언급했지만 지휘관의 불화와 교량의 조기폭파 그리고 미8군의 급속한 후퇴작명과 이에 따르는 사단간의 후퇴순위 논쟁동이 한데 겹쳐서 비롯되었다.

    중앙일보

    1970.10.16 00:00

  • (84)「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국군의 전선정비(8)

    동해안 지구에 포진했던 이성가 대령의 국군 제8사단은 적의 중압을 받으면서도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교적 질서 정연히 후퇴작전을 수행한 부대였다. 이 사단은 대관령 평창 원주

    중앙일보

    1970.10.12 00:00

  • 총 잃은 유 상사·박의 형 구속

    국방부는 5일 요즘 일어난 진주·양구의 인질, 살해사전 등 군의 총기관리 소홀로 빚어진 각종 사고를 중시, 각 군에 무기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국방부는 앞으로 개인화기나

    중앙일보

    1970.09.05 00:00

  • (25) 가장 길었던 3일 (25)

    한 나라가 외침을 받아 수도가 함락 직전에 놓였을 때 국가의 상징이며 민족의 구심점인 대통령의 일거일동이 그 나라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재기할 기회가 있는

    중앙일보

    1970.05.27 00:00

  • 주목받는 신인의 광장

    30세 전후의 시인 작가평론가 약20명이 모여 계간동인지 「68문학」을 창간, 새해 문단에 첫선을 보였다. 동인문학상수강작가를 포함, 주목받는 신인들로 구성된 이 동인은 「정신의

    중앙일보

    1969.01.25 00:00

  • (1)안보외교 어제와 오늘

    한국전쟁이 휴전한지도 오는 27일로 l5주년-. 북괴는 이미 1961년에 남한적화를 위한 5단계 전략을 마련하고 남침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어 한반도의 안보태세 확립은 과거 어느 때

    중앙일보

    1968.07.08 00:00

  • 얼룩진 세태

    해방 22년의 전반이 통일을 위한 시도였다면 그 하반은 「분단」이란 기정 사실 위에서 대내적인 충실로 「승공」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내면적 정치투쟁의 과정이었다 할 수 있다. 또

    중앙일보

    1967.08.15 00:00

  • 다시 황금시대로|TV 사양기에서 탈출구 찾아

    『「텔리비젼」「프로」를 하루동안 TV 수상기 앞에 앉아 시청해보시면 오늘날 「프로」가 얼마나 막대한 불모의 낭비지대인가 아실 것입니다』-61년5월 미국 전 방송관계자회의연차총회에

    중앙일보

    1966.12.2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