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276)적의 춘계공세(5)

    전회에 이어 국군 제5사단과 그 우측에 인접한 제7사단의 전투상황을 살펴보겠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중공군은 춘계공세 때 중부와 중동부에 주공을 두었기 때문에 이 방면에 배치

    중앙일보

    1972.01.12 00:00

  • (275)적의 춘계공세(4)

    적의 춘계 공세가 시작될 때 한국군은 도함 9개 전투 사단이 전선에 배치돼 있었다. 서부의 미제1군단 산하에는 국군 제l사단(사단장 강문태 준장)이, 그 우측의 미 제9군단에는 제

    중앙일보

    1972.01.10 00:00

  •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국전에 입선한 적도 있다는 그 여인이 장난삼아 만들지는 않았을 터이고, 내 생각을 솔직이 얘기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조각은

    중앙일보

    1972.01.01 00:00

  • 새해는 「우리의 해」

    71년의 우리 나라 영화계는 사상최고의 불황이라는 퇴조의 소용돌 속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어야했다. 그 숱한 변화 가운데서 대중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변화는 이른바 대「스타」들이

    중앙일보

    1972.01.01 00:00

  • (333)가요계 이면사(13)|고복수

    내 아내이자 동료인 황금심이 가요계에 나온 것은 1935년이다. 본명은 황금동이고 16세때 「데뷔」했는데 열 서너살 될 때부터 내가 잘 아는 터였다. 황금심의 집은 지금의 청진동

    중앙일보

    1971.12.15 00:00

  • (261)「건벽청야」작전(2)

    (2) 문제의 「거창사건」은 1951년2월11일에 발생했다. 사단장의 「건벽청야」작전방침에 따라 이 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하던 9연대3대대가 거창군 신원면의 주민을 「통비분자

    중앙일보

    1971.12.03 00:00

  • 주산 선수단 인솔하고 대만을 보고 온 김정옥 여사

    「중공 가입 자유중국 축출」을 결의한 「유엔」 총회 발표로 전 세계가 흥분하던 10월26일. 바로 자유중국의 대북에 있었던 동구 여중 교장 김정옥씨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민들의

    중앙일보

    1971.11.12 00:00

  • 민족의 발언|국민방위군 사건 ⑧

    1951년 7월5일부터 대구 동인국민학교 강당에서 열린 방위군간부들의 부정을 단죄하는 군사군법 회의에는 첫날부터 인파가 밀어닥쳤다.정부도 이례적으로 이 군재를 공개리에 진행시키고

    중앙일보

    1971.11.05 00:00

  • 파리문단에 인 「조르지상드」 「붐」

    「쇼팽」과의 세기적 연애로 더욱 유명해진 19세기 이상주의 「프랑스」 여류문인 「조르지·상드」서한문, 자숙전이 「가르니에」, 「갈리마르」, 「플라마리옹」등 「프랑스」의 3대 문학출

    중앙일보

    1971.10.13 00:00

  • 남북대화 시대의 언론

    ▲차기벽(성균관대 교수) ▲노재봉(서울 문리대 교수) ▲박봉식(서울 문리대 굣N) ▲손제석(서울 문리대 교수) 사회=김인호(중앙일보 편집국장) 기록=윤기병,허준 기자 때=1971

    중앙일보

    1971.09.22 00:00

  • (230)유엔군의 총퇴각(3)|평양 철수(2)

    12월 4일, 「맥아더」원수가 평양포기를 결정하고 시내에서 군 기관을 철수시켰을 때 중공군은 아직도 백여리 북쪽 거리에 있었다. 중공군대 부대가 12월 3일에 평양북방 50㎞의 요

    중앙일보

    1971.09.21 00:00

  • 예인선 5척 취항

    교통부는 비룡호(2천마력)등 대형선박의 예인선5척을 새로건조, 17일상오10시 부산항에서 장성환교통부장관등 관계관이 참석한가운데 취항식을가졌다. 4억4천4백만원을들여 작년8월25일

    중앙일보

    1971.09.17 00:00

  • (217)남과 북의 포로수용소(9)|박 백 중위의 경우(2)

    북괴는 처음부터 포로를 자기네들 전력강화를 위한 인적자원으로 보고「제네바」협정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특히 국군포로에 대해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폐인이 된 자를 제

    중앙일보

    1971.08.21 00:00

  • (215)남과 북의 포로수용소(7)

    중공군은 잡은 한국군 포로를 일정한기간 억류하고 있다가 모두 북괴측에 인계 관리케 했다. 포로들은 중공군에 잡혀 있는 동안에도 고생이 막심했지만, 모든 시련과 고난은 북괴 측에 인

    중앙일보

    1971.08.16 00:00

  • 단장 4반세기 내 혈육·그 산하

    이산가족 찾기, 서신왕래를 제안한 최두선 대한적십자사총재의 성명은 온 국민의 찬성과 환영을 받는 가운데 북괴 측의 성의 있는 답변을 기다리는 문턱에 있다. 8·15해방을 대부분 이

    중앙일보

    1971.08.14 00:00

  • (214)남과 북의 포로수용소(6)

    한국전쟁 때 북한에는 벽동 화풍 천마 우시 외귀 만포진 삭주 북진 강동 황주 등 10개소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물론 전쟁추세에 따라 수용소 규모가 달라지고 폐쇄, 혹은 신설된 것

    중앙일보

    1971.08.13 00:00

  • (205)중공군 개입(4)|홍군의 실태(상)

    정권수립후 불과 1년만에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성장과정을 대충 살펴보고 실제로 그들의 실태와 전투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관계 증인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중공군이 처음으로 탄생

    중앙일보

    1971.07.23 00:00

  • (202)|중공군 개입(1)|운산의 첫 나팔소리|「6·25」21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미국이나 우리 한국이 가장 염려했던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그 동안의 구구한 억측을 깨고, 10월25일 실제 전투에서 확인됐다. 중공정권은 이미 9월 중순부터 북평 방송의 공식성명

    중앙일보

    1971.07.16 00:00

  • (192)-(8)「6·25」20주… 3천 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5) 평양공격은 「프랭크·밀번」소장의 미 제1군단의 작전담당이어서 그 군단소속의 미 제1기 병사, 한국군 제1사, 미 제24사, 영국군 제27여단이 각각 1번 입성의 진격경쟁을

    중앙일보

    1971.06.23 00:00

  • (184)|6·25 20주…3천 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서울 수복(9)|부역자 처리(3)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다룬 부역자 총수는 1만8천명서부터 2만명에 달했다. 이중 A급으로 군재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부역자는 관계자들의

    중앙일보

    1971.06.04 00:00

  • (183)|서울수복(8)|6·25 20주…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부역자 처리(2)|문화인 등은 관대 처분

    전회에 이어 부역자처리 시말을 관계자들로부터 계속 들어보겠다. 증인들의 증언내용이 약간 상치되거나 혹은 차이가 나는 대목이 더러 있다. ▲오제도씨(당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지휘부검사

    중앙일보

    1971.06.02 00:00

  • 8대 국회 여성의원들의 설계

    여야가 「여성지위향상」을 공약했던 선거전이 끝나고 8대 국회가 출범을 서두르고있다. 이번 국회에는 전례 없이 4명의 여성의원이 끼어있으며, 이들이 여성을 위한 문제해결에 척후병의

    중앙일보

    1971.05.31 00:00

  • (182)|서울 수복(7)|부역자 처리(1)|6·25 20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

    서울수복과 정부환도를 기뻐할 사이도 없이 제일 먼저 심각하게 고개를 쳐든 것이 소위 도강파와 잔류파와의 대립이었다. 물론 도강파란 한강을 넘어 남으로 피난 갔던 사람들이고, 잔류파

    중앙일보

    1971.05.31 00:00

  • (178)|시가전 |서울 수복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9월25일 저녁에 적의 서울 방어 주저 항선은 무너졌다. 미 제5해병 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격전 끝에 연희고지 일대의 「서부 방벽」을 돌파했고 미7사단 32연대와 한국군 17연대는

    중앙일보

    1971.05.2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