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51)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준·이상설·이위종의 세 밀사는 고종황제의 뜻을 받들고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약소 국가의 비애로 아무 성과도 얻지를 못하게 되자 결국 이준 열사는 분통이

    중앙일보

    1970.07.04 00:00

  • (50)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제1회 만국 평화 회의는 1899년에 화란국 해아에서 개최되었고 제2회 평화 회의는 1907년에 역시 해아에서 개최되었는데 한국 황제 고종의 밀사가 해아에 나타난 것은 제2회 때의

    중앙일보

    1970.07.03 00:00

  • (48)해방에서 환국까지

    민규수는 그후 해방되던 다음해인 1946년 5윌에 귀국하였는데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것은 바로 8·15해방 전날밤의 일이었다. 당시 상해는 폭격도 뜸하고 공습도 별

    중앙일보

    1970.07.01 00:00

  • 해방에서 환국까지|인간 이근(47)-김을한

    영친왕의 납치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을때 민규수 (민갑완 여사)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여기서 그녀가 남기고간「백년한」에서 당시의 경위와 심경을 엿보기로 하자. 『아침에 출근을 하신

    중앙일보

    1970.06.30 00:00

  • (45)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일행이 구라파여행을 떠난 것은 1927년 5월이었는데 그보다 7년전인 1920년 6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되는 불문잡지 자유대한(La Coree Libre)에 『강제결혼』

    중앙일보

    1970.06.27 00:00

  • (44)해방에서 환국까지

    당시 상해에는 마침 민규수가 와 있었다. 민규수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어 영친왕과 약혼을 했다가 총독부의 등쌀로 파혼을 당한 민갑완여사인데, 나어린 사내동생(민천

    중앙일보

    1970.06.26 00:00

  • (43)해방에서 환국까지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중국에 망명해있던 지사들이 모여서 만든 정부로, 말하자면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위해 싸우는 가장 큰 조직체였다. 초대대통령은 이승만박사였

    중앙일보

    1970.06.25 00:00

  • (42)해방에서 환국까지

    시노다(소전)차관이 이렇게 대어드니 궁내성 관리도 약간 당황하면서 그렇지요. 개인의 자격으로 가신다면 구태어 반대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면 그렇게라도 곧 양행 수속을 해 주시오.

    중앙일보

    1970.06.24 00:00

  • (41)해방에서 귀국까지

    그러면 영친왕은 대체 무엇때문에 그토록 구라파(구주)여행을 고집하였던가? 1923 관동대진때에 저희 나라의 혁명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의 유학생과 노동자를 수

    중앙일보

    1970.06.23 00:00

  • (41)해방에서 환국까지

    그러면 영친왕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구라파(구주)여행을 고집하였던가? 1923 관동대진때에 저희 나라의 혁명을 미리 방지하기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의 유학생과 노동자를 수

    중앙일보

    1970.06.23 00:00

  • (38)해방에서 환국까지

    1923년 9월 초하루날의 일이었다. 그날 일본에서는 소위 관동 대진재가 일어나서 동경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수만명이 불에 타 죽는 비극이 발생했다. 인심이 극도로 흉흉하여 눈

    중앙일보

    1970.06.19 00:00

  • (37해방에서 환국까지

    당시 상해임시정부 외교부차장 여운형씨의 인기란 굉장한 바가 있었다. 더우기 미스터·코리아라고 할만큼 준수한 용모와 늠름한 태도는 일본사람들을 경탄케하여 그의 일거일동이 날마다 커다

    중앙일보

    1970.06.18 00:00

  • (36)해방에서 환국까지

    진왕자가 세상을 떠난지 꼭 10년만인 1931년12월29일에 둘째 아들 구왕자를 낳았다. 일본의 황실전범에 의해서 양자제도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세자가 없으면 왕가는 자연 단절될뿐

    중앙일보

    1970.06.17 00:00

  • (35)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결혼식이 동경에서 거행될 무렵 서울에 계신 순종황제는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여 일본에서 결혼식이 끝나거든 곧 귀국해서 한국식으로 다시 식을 올리자고 하셨으나 일본 궁내성과

    중앙일보

    1970.06.16 00:00

  • (33)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의 정략결혼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민규수였다. 민규수는 당시 주영공사를 지내고 승후관으로 있던 민영돈씨의 큰 따님으로 영친왕이 일본으로 건나가기 직전에 장래의 영친왕비

    중앙일보

    1970.06.13 00:00

  • (32)해방에서 환국까지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판명된 일이지만 당시 일본의 황태자비를 선정함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파벌과 권력이 개재해서 파란이 중첩하였으니 일본군벌의 원로로 궁중과 부중에서 최고의 권력을

    중앙일보

    1970.06.12 00:00

  • (29)해방에서 환국까지

    고종황제의 국장은 3월3일로 정해졌는데 그날을 이틀앞둔 3월1일이 되자 우리 역사상 유명한 삼·일 독립운동이 터졌다. 당시 서울에는 인산(임금의 장례)을 구경하려고 경향 각지에서

    중앙일보

    1970.06.09 00:00

  • (28)해방에서 환국까지

    당시 일본은 군벌의 전성시대로 육군대장 야마가다(산현유붕)는 소위 장주벌의 대표격으로 원로적 지위에 있었고 역시 육군대장 데라우찌(사내정의)는 조선총독으로 있다가 총리대신이 되어

    중앙일보

    1970.06.08 00:00

  • (27)해방에서 환국까지

    아무리 문초를 하고 위협을 해도 도무지 자백을 하지않을뿐더러 무슨 확실한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므로 김시종은 한달만에 겨우 석방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었으니 그

    중앙일보

    1970.06.06 00:00

  • (26)해방에서 환국까지

    그토록 영친왕을 사랑하고 아끼던 고종황제도 그후 10년이 못가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조금전인 1919년1월25일 밤의 일이었다. 평소에 식혜

    중앙일보

    1970.06.05 00:00

  • (24)해방에서 환국까지

    1907년은 구한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기가 된 해이니 역사상 유명한 해아밀사사건이 발생한 것이 그해 6월이요, 그 일로 말미암아 고종황제가 양위를 한 것이 7월20일이요, 영

    중앙일보

    1970.06.03 00:00

  • (23)해방에서 환국까지

    해방전 일본의 교육방침은 되도록 조선인에게는 조선의 역사를 기르치지를 않았으므로 학교에서는 절대로 진정한 역사를 배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구왕실의 역사도 잘아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중앙일보

    1970.06.02 00:00

  • (22)해방에서 환국까지

    명성황후의 용모나 인품에 대해서는 도청도설로 여러가지 말이 많은데다가, 일본측의 악선전도 있고해서 어느것이 정말이고 거짓인 것을 알아내기가 매우 힘드는바, 당시 명성황후의 시의로

    중앙일보

    1970.06.01 00:00

  • (21)|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은 생모인 엄 비보다도 적 어머님인 명성황후(소위 민비)를 더한층 가엾은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엄 비는 상궁으로 있다가 자기를 낳고 비로 올라선 분이기 때문에 그다지

    중앙일보

    1970.05.3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