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유상의 터널 - 그 시작과 끝 제1부 독립을 위하여

    김삼룡·이주하·정태직 세사람이 검거된 것은 사실 박헌영의 발밑에 있는 축답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남노당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했다. 새삼스러이 눈앞이

    중앙일보

    1989.08.25 00:00

  • (3)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씨 사상편력회상기 남로당 최대 비극의 날

    『박 동무, 김삼룡 동지를 탈환할 작전을 세우시오.』 3월28일 밤 나는 김삼룡·이주하의 체포사실을 정태식에게 보고했다. 깜짝 놀란 표정의 정은 한참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울음을

    중앙일보

    1989.08.21 00:00

  • (2)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씨 사상편력회상기 남로당 최대 비극의 날

    『누구야! 섯!』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무장경관의 카빈총구가 나의 가슴을 찌르듯이 다가왔다. 50년3월27일 밤 서울동대문 앞에서였다. 순간 나는「이제는 꼼짝없이 갇혔구

    중앙일보

    1989.08.19 00:00

  • 「환상의 터널」로 다시 가며…|"「주석님」고개 숙여선 대화 안되죠"

    박갑동 씨가 서울에 되돌아 온 것은 50년 9·28수복 때 한국군과 UN군에 등을 떼밀려 북한으로 간지 18년 만인 68년 봄이다. 「등을 떼밀려」라고 한데는 특별한 뜻이 있다.

    중앙일보

    1989.08.15 00:00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회상기

    중앙일보는 광복 44주년을 맞아 전 남로당 최후 지하총책 박갑동 씨의 사상편력 회상기『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을 17일부터 연재합니다. 8·15 해방정국을 극심한 좌우이념대립의

    중앙일보

    1989.08.14 00:00

  • (3) 왜 서울서 3일 허송했나

    전진을 멈춘 서울의 사흘-. 이것은 6·25전란 최대의 수수께끼다. 북한공산군에겐 결정적 승리의 시간을 잃게한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고 한국군으로선 지리멸렬 상태의 군대를 가까스로

    중앙일보

    1986.06.26 00:00

  • (10) 북으로간 연예인들의 이야기|수렁길의 김연실

    1962년 이른바「노동개조」처분을 받고 순안협동 농장으로 추방된 김연실은 일반 농장원들과 똑같이 괭이와 삽을 들고 노동을 했다.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언제나 자기에게 할당된

    중앙일보

    1986.03.31 00:00

  • 고정간첩 29명 검거

    국가안전기획부는 10일 재북간첩 송창섭(62·노동당 연락부 부부장)에게 포섭되어 간첩교육을 받은 뒤 서울·충북을 거점으로 25년간 장기 암약해온 송지섭(59·전 군수사기관원·헌병출

    중앙일보

    1982.09.10 00:00

  • (851)|내가 아는 박헌영(170)-북에서의 좌절감

    나를 강제로 개성까지 데려다놓고는 남한에 침투하여 가서 「대남 공작」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동무는 지하공작의 우수한 경험자가 아닌가. 절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중앙일보

    1973.09.18 00:00

  • (850)|내가 아는 박헌영(169)-장병민 설득 실패

    내가 서울지하당시대 최후까지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지내왔다는 것이 의외로 나를 괴롭히게 하였다. 나의 고향 경남의 속담에 나무재주 잘하는 놈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물 재주 잘하

    중앙일보

    1973.09.17 00:00

  • (838)|내가 아는 박헌영(157)|박갑동

    김일성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온다 온다는 중공의 원병은 오지 않고「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질풍과 같이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김일성에게『기본방침은 구원병을 파견하기로

    중앙일보

    1973.09.03 00:00

  • (831)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0)

    6월28일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방방이 다 들여다봐도 이미 벌써 다 뛰어나가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다만 「알루미늄」의 식기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소공동에 있는 정 판사

    중앙일보

    1973.08.25 00:00

  • (830)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8)|박갑동

    6월 중순에 들어서자 전에 월북했던 남로당원을 서울시내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천 수상서에는 월남하다가 잡힌 남로당원이 7, 8

    중앙일보

    1973.08.23 00:00

  • (82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7)|박갑동

    김일성은 전 힘을 무력통일에 집중시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최고기관으로서 최고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멤버」는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 이승엽 김두봉 김책 강건 등 7명으로 구성하

    중앙일보

    1973.08.22 00:00

  • (828)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6)|박갑동

    전회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평양의 김일성은 4월의 정치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전쟁준비를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정치위원회 결정의 제1의 조항인『당 기관·정권기관·민청·직업동맹(노

    중앙일보

    1973.08.21 00:00

  • (825)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3)

    박헌영의 입장은 곤란하였다. 남로당지하당의 평화통일 방안을 중요한 자료로 제출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로당지하당이 괴멸된 이상 자기의 발언의 무기가 줄어든 것을 느끼지 않을

    중앙일보

    1973.08.17 00:00

  • (824)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2)

    김삼룡이 잡히고, 이주하가 잡히고, 그리고 또 정태식까지 드디어 잡히고 말았다. 이 세 사람이 잡혔다는 것은 남노당 지하당의 괴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실 박헌영의 발 밑에서,

    중앙일보

    1973.08.16 00:00

  • (81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37)-박갑동>

    북한의 군사 정세는 이상 본 바와 같으나 1949년이라는 해는 김일성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바쁜 해였다고 볼 수 있겠다. 당시 북한은 그 나름대로 자체 안의 경제 상

    중앙일보

    1973.08.10 00:00

  • (818)내가 아는 박헌영(136)|박갑동(제자 박갑동)

    무력준비에 나선 북한은 1949년 7월에는 「조국보위후원회」(군사후원회)를 면·이 등 행정단위의 말단까지 조직하고 민간에서 비행기와 전차를 구입, 헌납하는 운동을 일으켜 군비확장

    중앙일보

    1973.08.09 00:00

  • (817)내가 아는 박헌영(134)|박갑동(필자 박갑동)

    김삼룡이 정태식에게 시달한 지시는 「남로당 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건」이었다. 기한은 3윌25일까지였다. 남로당지하당의 남북통일안을 평양의 박헌영에게 보내는 것은 3월

    중앙일보

    1973.08.08 00:00

  • (816)내가 아는 박헌영(134)|박갑동(제자 박갑동)

    1950년1월2일 밤 이날 밤은 나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날의 밤이었다. 그것은 내가 수사기관에 포위되었다가 무사히 벗어났다는 기억에서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중앙일보

    1973.08.07 00:00

  • (815)내가아는 박헌영

    기진맥진 이모의 집은 큰집이 되어서 가운데 복도가 있어 그 양쪽에 방이있고 또 앞뜰에면한쪽에복도같은 마루청이 있었다. 가운데 복도는 현관에 직결되어 있기때문에 수사기관원들이 가운데

    중앙일보

    1973.08.06 00:00

  • (813)내가 아는 박헌영

    이논진부의 고민 정태식과 김삼룡과 나와 세사람이 인적기가없는 캄캄한 서울운동장뒷길을 걸어가며 밀담을 하고 있을때 우리앞에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몇걸음

    중앙일보

    1973.08.03 00:00

  • (812)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

    내가 기관지부 이론진「블록」통제지도 부책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중앙선부부도 맡게되어 나의 일은 불어났다. 매일 기관지부·선전부·이론진의 각 책임자 그리고 각부의 중요간부들과

    중앙일보

    1973.08.0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