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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극기·환호속에·남북적회담대표들 돌아와

    북에서의 4박5일 일정을 마친 한적대표단 일행 54명은 2일하오4시50분 이범석수석대표를 태운 서울자0-1856호를 선두로 6대의 검은 「캐딜랙」으로 「자유의 다리」를 건너 서울로

    중앙일보

    1972.09.04 00:00

  • 「민족」공통점 보고와

    한적대표 수행원 및 기자단일행 54명이 평양에서의 남북적 제1차 본회담을 마치고 입북 1백2시간여만인 2일하오3시 분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돌아왔다. 이날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중앙일보

    1972.09.04 00:00

  • 북한 파견 7백리|이광표특파원 평양 왕래기|「단 하나」로 집약된 사회

    그렇게도 철저하게 『단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집약시킬 수가 있을까? 차라리 『순간적』이었다고 할 『북한의 4박5일』은 집체조직과 김일성에 대한 유일사상의 홍수였다. 집체조직은

    중앙일보

    1972.09.04 00:00

  • 「돌아오지 않는 다리」건너 돌아와|한적 대표일행 4박5일 일정 마치고

    【판문점=대한민국 신문·통신취재단】『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또 오십시오』-남북적십자 본 회담 한적 측 대표 등 일행54명은 2일 상오

    중앙일보

    1972.09.02 00:00

  • 「가족 찾기」정지마친 평양적십자 회담

    남-북 적십자 본 회담은 분단의 장벽을 넘어선 실질적인 남북교류의 실현이란 거창한 부산물을 낳으면서 이제 조심스러운, 그러나 순조로운 첫발을 내디디었다. 감격적인 출발이기에 30일

    중앙일보

    1972.08.31 00:00

  • 이범석 한적 수석대표 본회담 개회연설 요지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동포형제가 한자리에 마주앉게 된 이 감회와 기쁨을, 우리는 우리들 조상 영전에 자랑스럽게 고하면서 기어이 열리고야 만 이 첫 회담

    중앙일보

    1972.08.30 00:00

  • 평양에서의 첫 밤|본사 이광표 특파원 평양에서 이틀째

    【평양30일 신문·통신 공동취재단】평양에서의 첫 밤은 남북적십자회담의 전도를 축하하는 만찬과 함께 평양시내 야경을 바라보는 휴식으로 보냈다. 만찬은 29일 밤 8시30분부터 9시5

    중앙일보

    1972.08.30 00:00

  • 단절27년 겨레의 숙원은 풀리려나|가깝고도 먼 평양길

    아라사말을 지껄이는 「모스크바」사람들도, 중국말을 지껄이는 북경사람들도 다 왔다갔다하는 평양이다. 더우기 요즘에 와서는 영어를 지껄이는 「뉴요크」사람들도, 일어를 지껄이는 동경사람

    중앙일보

    1972.08.29 00:00

  • 남북적 본회담-1차 8월30일 평양 2차 9월13일 서울서

    사적인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은 8월30일 상오 10시 평양에서 개최하고 2차 본회담은 9월13일 상오 10시 서울서 열기로 최종결정 됐다. 한적은 당초 서울 개최

    중앙일보

    1972.08.11 00:00

  • (527) |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 (154)|윤치영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박사는 독립의 전도가 요원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암담했다. 서서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일시에 엄습해온 비관이었다. 아침부터 보는 얼굴 속에 내가 어

    중앙일보

    1972.08.04 00:00

  • (426)경무대 사계|황규면(제자는 윤석오)

    6·25로 국민 모두가 피해를 보았지만 국회의 피해가 특히 더했다. 정부의 수도사수공언과 국회자체의 사수결의 때문에 2백10명의 의원 중 62명이 피난을 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

    중앙일보

    1972.04.05 00:00

  • (26)「사랑의 교도보」 23년-인천 소년교도소 홍종식씨

    교도관이 스스로 푸른 수인복을 입고 다닌다. 수인과의 거리감을 없애기 위함이란다. 인천소년교도소 충의소년단장 홍종식 교도보(47)의 별난 모습이다. 『사랑과 지성』이란 생활신념으로

    중앙일보

    1972.03.16 00:00

  • U대회 선수단귀국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가했던 우리 나라 대표선수단 일행 5명이 김규택 단장의 인솔로 10일 하오1시35분 KAL기 편으로 귀국, 개선했다. 3명의 산수

    중앙일보

    1972.03.10 00:00

  • 20년만의 성묘|연천·청원 등 민통선주민들

    【철원=안명찬 기자】20년만에 찾아간 고향과 선영은 키를 넘는 갈대·엉겅퀴 등 가시덤불에 얽힌 폐허였다. 집터는 자취를 잃어 어디가 어디인지 찾을 수 없었고, 조상의 무덤 위에는

    중앙일보

    1971.10.04 00:00

  • (231)유엔군의 총퇴각(4)|평양철수(3)

    피란 길에는 으례 여러 비극이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평양철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 당국에서 민간인의 철수계획을 마련하지 못해서 큰 혼란을 빚어냈다는 것은 전회에서 밝힌 대로

    중앙일보

    1971.09.23 00:00

  • 엿새만의 구면…미소의 재회|남-북 적십자 두 번째 접촉의 날

    남-북 적십자사가 26일 낮 12시 두 번째로 판문점에서 만났다. 지난20일 첫 번째로 만났을 때와는 달리 긴장이 가시고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만난 남-북 적십자사의 파견

    중앙일보

    1971.08.26 00:00

  • |무주구천동

    오랜만에 모인다는 동창회에 혼자 빠져서 정말 미안해요. 오래 전부터 짜인「스케줄」이라 변경할 길이 없었어. 그래 많이 들 모이고 쌓인 회포들 실컷 풀었는지. 관광「버스」에 흔들리

    중앙일보

    1971.08.21 00:00

  • 정금자|영흥도

    K선생님. 저의 집 앞 바다를 지나는 객 선이 오늘도 저렇게 피서객을 하얗게 싣고 내려갑니다. 뒷산 솔밭에 바람소리가 늘 시원한 섬이지만 이글거리는 태양과 내뿜는 지열 때문에 무성

    중앙일보

    1971.08.20 00:00

  • (199)38선 돌파와 북진(15)

    (상) 「유엔」군이 북한에 진격하여 수복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이 지역의 행정을 어떻게 실시하느냐가 큰 문제로 대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북의 수복지역은 의당 대한민국의 관할에 속

    중앙일보

    1971.07.09 00:00

  • 밤거리 정화 운동

    서울의 밤거리 정화운동이 시작되었다. 6·25사변 스물 한 돌인 25일 밤 양탁식 서울시장을 비롯, 여성단체 협의회 등 회원 3백여 명은 「퇴근후의 시간은 가족과 함께. 밝은 거리

    중앙일보

    1971.06.26 00:00

  • (193)-(9)「6·25」21주 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6) 10월 19일 상오 11시쯤 평양은 국군 제1사단, 제7사단, 그리고 미 제1기갑사단에 의해 완전히 탈환됐다. 「프랭크·밀번」소장의 미 제1군단이 10월 9일 38선을 넘어

    중앙일보

    1971.06.25 00:00

  • (181)-서울수복행정과 치안|「6.25」20주 3천여 증인회견 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

    정부의 환도가 전격적이었던 만큼 이에 따른 수도의 행정과 치안질서의 회복도 빨랐다. 정부는「유엔」군의 인천 상륙 직후에 서울수복에 대비하여 30여명의 행정수복요원을 비밀히 임명,

    중앙일보

    1971.05.29 00:00

  • (180)서울수복(5)|환도

    9윌28일 상오10시, 경남도지사 양성봉씨 관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장관들의 얼굴은 기쁨과 흥분으로 뻘겋게 상기돼 있었다.

    중앙일보

    1971.05.26 00:00

  • (133)우정 80년(13)강직순

    1964년 12월6일 상오 9시30분, 흥분 속에 휩싸인 버스 한대가 고요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체신부 뒤뜰을 떠났다. 목메어 찾던 홍영식 선생의 묘소 있는 곳이 알려지자 전국 우

    중앙일보

    1971.04.1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