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영화 이 장면] 더 웨일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애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은 러닝 타임의 대부분이 찰리(브렌든 프레이저)의 방에서 이뤄진다. 화상 수업으로 작문을 가르치는 찰리는 272㎏의 거구. 방문 간호사 리즈(홍 차우)와 피자 배달부의 목소리, 그리고 창가의 새 한 마리만이 그곳을 방문한다.   그런 일상이 깨진 건 뉴라이프 선교사 토머스(타이 심킨스)의 방문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겠다고 온 젊은 전도자는 그곳에서 동굴 속 고래처럼 은둔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방문은 이어진다. 8살 이후로 본 적 없는 딸 엘리(세이디 싱크)는 엄마 몰래 찰리를 만나러 왔고, 이어 전처인 메리(사만다 모튼)도 찰리의 집을 찾는다.   애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 ‘더 웨일’은 구원에 대한 영화다. 찰리는 트라우마와 죄책감 때문에 내면이 붕괴하면서 폭식 장애를 겪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젠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집에 갇히게 되었고, 소파와 한 몸처럼 붙어살아가며 서서히 죽어간다. 그는 다시 스스로 설 수 있을까. 육체에 파묻힌 영혼을 일깨울 수 있을까.   그 대답은 해변의 어느 풍경이다. 토머스가 도착하는 도입부와 함께 ‘더 웨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집 밖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아내와 딸과 함께했던 찰리의 아름다운 기억이며, 이때 그는 자신의 두 다리로 바닷가에 서 있다.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건 자기 자신일 뿐. 이 영화가 전하는 다소 냉혹한 위로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3.03 00:21

  • [그 영화 이 장면] TAR 타르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토드 필드 감독의 ‘TAR 타르’(이하 ‘타르’)는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설정된 이리나 타르라는 허구의 인물을 다루지만, 주연 배우 케이트 블랜쳇은 마치 실재 인물을 재창조하는 듯 생생한 연기를 보여준다. 전반부가 타르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서서히 붕괴하는 거장의 복잡한 내면에 집중한다. 성 추문에 휩싸인 타르는 결국 지휘봉을 놔야 하는 상황에 처하며,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난다.   TAR 타르 여기서 그의 연기를 감싸는 건 촬영감독 플로리안 호프마이스터의 치밀한 카메라다. 필름으로 찍은 듯한 느낌, 심도 깊은 화면, 꼼꼼하게 설계된 조명, 탄탄한 구도의 앵글 속에서 블랜쳇은 압도적인 피사체가 된다. 특히 클로즈업의 힘은 대단하다. ‘타르’는 롱 숏에 타르의 고독한 모습을 담기도 하지만, 종종 클로즈업으로 그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특히 타르를 정면으로 포착한 후반부 장면은 인상적이다. 지휘자 자리를 빼앗긴 그는 지휘대로 돌진해 폭력으로 후임자를 밀어내는데, 그 결연한 행동 직전의 심정을 담아낸 이 클로즈업은 마치 다큐의 한 장면 같은 현실감을 지녔다. 이처럼 ‘타르’는 강렬한 클로즈업과 소외된 느낌의 롱 숏을 교차시키며 리듬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괴물 같은 배우는 괴물 같은 캐릭터를 만나 영화사에 남을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158분의 러닝타임을 이처럼 밀도 있는 아우라로 채울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2.24 00:38

  • [그 영화 이 장면] 피터 본 칸트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피터 본 칸트’는 독일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이 1972년에 만든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이하 ‘페트라 폰 칸트’)의 리메이크다. 영화사의 천재 중 한 명인 파스빈더는 37살 나이에 요절했지만, 영화와 연극과 TV를 오가며 작품 40여 편을 남긴 다산성의 작가였고 저항적이며 도발적이었던 시네아티스트였다.   그영화 이장면 패션 디자이너였던 여성 주인공 페트라 폰 칸트가 영화감독인 남성 주인공 피터 본 칸트(드니 메도세)로 바뀌었지만, 대부분은 비슷하다. 전작의 폰 칸트가 젊은 모델에게 빠졌다면 이번엔 신인 배우 아미르(칼릴 벤 가비아)가 대상이다. 피터 본 칸트의 뮤즈였던 여배우 시도니(이자벨 아자니),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어시스턴트 칼(스테판 크레폰) 등도 원작에서 왔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피터 본 칸트의 모습이다. 거구에 턱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모습은 파스빈더 감독을 연상시키며, 오종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와 흡사한 이미지의 배우를 캐스팅한다.   영화의 배경인 1972년은 ‘페트라 폰 칸트’가 나온 해로, 마치 ‘피터 본 칸트’는 이 시기 파스빈더에 대한 전기영화처럼 느껴지는데 특히 퀭한 눈으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재연 화면에 가깝다.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감독의 영화를 반세기 만에 다시 만들면서, 현재의 관객들에게 위대한 감독의 초상을 다시 소개하는 프랑수아 오종. 이것은 진정한 리스펙트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2.17 00:39

  • [그 영화 이 장면] 다음 소희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는 졸업을 앞둔 여고생 소희(김시은)이 취업을 하면서 시작된다. ‘사무직’이며 ‘대기업’이라고 좋아했지만, 소희의 첫 직업은 콜센터 상담원. 통신사 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설득해 결합상품을 파는 일을 한다. 항상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며 밝은 톤으로 응대해야 하지만, 온갖 폭언과 욕설에 시달려야 하는 지독한 감정 노동이다. 소희를 더욱 옥죄는 것은 실적이다. 사무실 벽을 차지하는 화이트 보드에 매달 매겨지는 순위와 그에 따른 성과급은, 사회에 첫발을 디딘 19살 청년 노동자의 가치이며, 소희는 숫자를 통해 자신의 ‘값’을 증명해야 한다.   다음 소희 ‘다음 소희’는 숫자에 가려진 인간에 대한 영화다. 수많은 ‘숫자의 미장센’ 안에서 인간은 마치 소품처럼 존재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실적’이다. 콜센터에선 각자 해낸 성과로, 학교는 취업한 학생수로 평가를 받으며, 그것은 경쟁의 근거가 된다. 다른 학교보다 더 많은 학생을 취업시켜야 지원금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정글 같은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엑셀 시트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이다.   ‘다음 소희’는 수많은 숫자를 통해 그런 현실을 차갑게 전달하며, 숫자의 살상력을 보여준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낸 이미지가 바로 ‘숫자 앞의 소희’다. 어쩌면 자기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생소한 숫자들로 규정되면서 ‘숫자 세계의 부품’이 된 소희. 가혹한 세상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2.10 00:43

  • [그 영화 이 장면] 애프터썬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은 2022년 전 세계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11살 된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와 서른 살 아빠 캘럼(폴 메스칼)이 튀르키예의 리조트에서 보낸 여름 휴가를 담은 이 영화에 이렇다 할 극적 구조는 없다.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대신 감독은 소피에 남아 있는 아빠와의 기억에서 몇몇 순간을 포착한다. 여기서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건 자그마한 캠코더다. 어느덧 과거의 아빠 나이가 된 소피(실리아 롤슨-홀)는 약 20년 전 그곳에서 찍은 영상을 보고, 그 거친 입자의 화면은 과거 장면과 연결된다.   그영화 이장면 ‘애프터썬’은 이미지의 울림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과 내면을 전달하며, 때론 거칠게 연결되어 독특한 톤과 무드를 만들어내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표현 영역을 확장한다. 특히 카메라의 360도 패닝으로 이뤄진 이 장면은 인상적이다. 공항에서 아빠에게 손을 흔들며 떠나는 캠코더 속 소녀 소피의 모습이 정지 화면으로 멈추면, 카메라는 180도를 움직여 이 화면을 보고 있는 성인 소피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다시 180도를 움직여 원래 자리로 가는데, 그곳엔 아빠가 서 있다.   초현실적인 이 장면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소피의 시점이며, 어쩌면 그의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아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평범한 숏의 연결을 통해 묵직하게 감정을 움직이는 힘. ‘애프터썬’이라는 영화가 지닌 마술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2.03 00:37

  • [그 영화 이 장면] 400번의 구타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이번 주 극장가에선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두 편을 만날 수 있다. ‘400번의 구타’(1959)와 ‘쥴 앤 짐’(1961)이다. 특히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가 27살 때 내놓은 그의 첫 장편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물결(누벨 바그)가 시작되었음을 알린 작품이다. 감독 자신의 자전적 요소를 토대로 한 이 영화는 긴 세월 동안 그의 페르소나가 될 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세상에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그영화이장면 앙트완 드와넬은 이른바 ‘문제아’다. 학교에선 선생님에게 혼나기 일쑤고, 무단결석을 한 후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부모도 그다지 아들에게 관심 없고, 급기야 앙트완은 가출한 후 타자기를 훔치다가 경찰에 넘겨져 소년원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도 탈출한 앙트완은 어디론가 정처 없이 달린다. ‘400번의 구타’는 학교와 가정에서 소외당하고 교화 시설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소년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장 영화다. 흥미로운 건 유독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앙트완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기성세대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앙트완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엔딩은 인상적이다. 달리던 앙트완은 바닷가에 도달한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는 돌아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이때 화면은 멈추며 소년의 클로즈업으로 영화는 끝난다. 외롭고 방황하는 청춘을 담아낸,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엔딩 중 한 장면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1.27 00:39

  • [그 영화 이 장면] 유령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이해영 감독의 ‘유령’ 앞에 붙은 ‘스파이 액션’이라는 장르 카피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1933년 경성을 배경으로 비밀리에 활동하던 항일 조직의 이야기를 다룬 ‘유령’의 전반부는 첩보 장르의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스파이 색출을 위해 고립된 호텔에 다섯 인물이 갇히면서 장르의 톤은 서서히 액션으로 바뀌어가고, 급반전의 모멘트가 등장하면서 영화의 장르 강도는 급상승하기 시작한다. 그런 면에서 ‘유령’은 액션의 지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무라야마 쥰지(설경구)와 박차경(이하늬)의 격투 신이다.   유령 총독부 통신과 감찰관인 쥰지와 암호 전문 기록 담당인 차경은 같은 부서에 근무하며 함께 스파이로 의심받고 있지만 입장은 크게 다르다. 조선은 독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 그들의 대결은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가치관의 충돌인 셈인데, 말 그대로 ‘몸으로’ 부딪힌다. 흥미로운 건 여자와 남자의 싸움이지만 그 성차는 전혀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대등한 피지컬을 지닌 두 사람의 대결이며, 주고받는 파워는 상당하고, 한순간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처절한 승부이며, 한 사람이 죽어야 끝나는 상황이다. 이처럼 ‘유령’의 액션은 젠더의 전형성을 거부하며, 후반부로 갈수록 기존의 장르 관습을 뒤엎고, 결국은 불꽃놀이 같은 액션 대폭발이 이어진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1.20 00:32

  • [그 영화 이 장면] 이니셰린의 밴시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여러 영화가 트로피를 나누어 가진 자리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파벨먼스’, 지난해 최고 화제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그리고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와 ‘엘비스’까지 여러 작품이 호명되었다. 여기 낯선 영화가 한 편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다.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그리고 각본상을 받은 이 작품은 ‘쓰리 빌보드’(2017)의 마틴 맥도나 감독이 연출했다. 한국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던 이 작품은 아일랜드의 작은 섬마을 이니셰린을 배경으로 한 블랙 코미디다. 한적하고 조용하게 시작한 영화는 발화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타오른다.   이니셰린의 밴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감정은 고독이다. 매일 바에서 맥주를 나누었던 파드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든 글리슨). 어느 날 콜름은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다. 남은 생을 예술에 쏟겠다는 콜름과 절친의 냉대가 섭섭하기만 한 파드릭. 고립된 섬 속에서 사는 그들은 내면마저 서로를 고립시키며, 이윽고 증오와 반목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 관계를 가장 잘 모여주는 건 집안의 콜름을 창밖의 파드릭이 바라보는 장면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영화를 통해 그 맥락을 알게 되면 잊을 수 없을 이 장면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복잡한 감정을 하나의 풍경으로 요약하듯 보여준다. 관객의 마음을 뒤흔들 ‘이니셰린의 밴시’. 개봉을 열망한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1.13 00:35

  • [그 영화 이 장면] 주토피아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계묘년, 토끼해를 맞아 선택한 작품은 애니메이션 ‘주토피아’(2016)다.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토끼 캐릭터는 ‘사고뭉치’ 벅스 버니겠지만, ‘주토피아’의 주디는 바른 이미지에선 최고다. 이 영화에서 주디는 평화의 의미를 실천하고 전달하는 메신저이며, 그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는 불굴의 캐릭터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주토피아’는 포유류 통합 정책에 의해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이상적인 도시다. 어릴 적부터 정의감이 남달랐던 주디는 경찰의 꿈을 이루지만, 그가 헤쳐나가야 할 현실은 만만치 않다.   ‘주토피아’는 올바른 세상에 대한 영화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동물들이 공존하는 주토피아처럼, 우리의 공동체도 평온하길 바란다. 하지만 문제는 생겨난다. 현실은 이상과 달리 복잡하고, 우린 모두 부족한 존재이며, 그 틈을 타 두려움으로 세상을 장악하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없는 걸까? 엔딩의 연설 신에서 주디는 말한다. “긍정적으로 보세요. 우린 공통점이 많으니까요.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더 포용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당부한다. “자신의 내면을 보세요. 변화의 시작은 바로 여러분이며, 저 자신이며, 우리 모두니까요.” 당연하고 평범하며 순진해 보이지만, 주디의 이 말은 평화가 절실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 아닐까. 한 해의 시작에서, 주디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란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3.01.06 00:59

  • [그 영화 이 장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에 등장하는 가장 인상적인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꼽는다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의 엔딩 장면이 아닐까 싶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표작인 이 영화는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우연히 동행하게 된 해리(빌리 크리스털)와 샐리(멕 라이언)가 12년 동안 쌓아가는 우정과 사랑 사이의 이야기다. 영화에 대한 해석부터 음식 주문 방식과 남녀 관계에 대한 생각까지, 모든 것이 다른 두 사람은 각자 연애와 결혼을 하며 서로에게 ‘남사친’과 ‘여사친’으로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해리는 샐리에게, 샐리는 해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대답은 어느 송년 파티에 있다. 북적이는 사람들은 즐거워하지만 샐리는 파티가 왠지 마뜩잖다. 한편 집에서 외롭게 새해 전야를 보내는 해리는 문득 샐리가 생각난다. 거리로 나와 뛰기 시작하는 해리. 마침 파티에서 빠져나오는 샐리와 만난다. “많이 생각해봤는데 당신을 사랑해.” 연말이라 외롭다고 해서 이런 방식은 곤란하다는 샐리에게 해리는 다시 말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남은 인생을 같이 보낼 거라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 여기 온 거야.” “당신은 정말, 미워할 수 없게 말을 해.” 카운트다운 끝에 드디어 찾아온 새해, 두 사람은 축하 키스를 나눈다. 그리고 흐르는 ‘올드 랭 사인’. 이보다 더 완벽한 송구영신 장면이 있을까. 잊고 지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연말이 되시길.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해피 뉴 이어!’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2.30 00:32

  • [그 영화 이 장면] 멋진 인생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는 무엇일까. ‘나 홀로 집에’(1990)나 ‘러브 액츄얼리’(2003)를 꼽을 수도 있겠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 작품을 능가하는 영화는 없을 것이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멋진 인생’(1946)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생 영화’인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되새긴다.   영화 멋진인생 어릴 적부터 이타적인 삶을 살아온 조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헨리 포터(라이오넬 배리모어)에 맞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 사업을 하고 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동업자인 삼촌이 8000달러를 분실하면서 조지는 큰 위기에 처한다. 인생을 건 의미 있는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 깊게 좌절한 그는 태어난 것 자체에 회의를 품으며 죽음을 생각하는데, 이때 천사(헨리 트래버스)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간다. 그가 태어나지 않은, 그래서 포터가 장악한 마을의 지옥 같은 모습이다. 베일리는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 현실로 돌아온 그는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기는데, 이 장면만큼 크리스마스의 행복하고 따스한 느낌을 드러내는 풍경은 없을 것이다.   힘든 현실 속에서 맞이하는 성탄절이 꼭 반갑진 않겠지만, 그래도 절망만 할 순 없는 건 우린 모두 ‘멋진 인생’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기 때문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부디 이 땅에 참된 평화를….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2.23 00:32

  • [그 영화 이 장면] 러브레터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겨울만 되면 찾아오는 영화가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1995)다. 1999년 개봉한 이 영화는 21세기 한국 극장가의 ‘계절 영화’가 되었고 올해가 벌써 7번째 재개봉이다. 영화는 설원에 누워 있는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의 얼굴로 시작한다.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3주기. 그가 세상을 떠난 장소인 산은 온통 하얗다. 그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는 이츠키의 졸업 앨범에 있는 주소로 편지를 보내 본다. 그런데 답장이 온다. 죽은 자에게서? 이때부터 동명이인과 1인 2역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영화 러브레터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로맨스와 죽음과 인연을 이야기한다. 섬세하게 뜨개질이 된 듯한 잔잔한 톤을 지녔지만 그 안엔 관객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것은 ‘운명적 판타지’의 요소들이며 그중 하나가 도플갱어의 모티브다. 왜 이츠키(남)는 히로코를 사랑했던 걸까. 이 비밀엔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으로 소화하는 히로코와 이츠키(여)의 설정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우체통이 있는 오타루의 어느 거리에서 조우한다. “이츠키씨!”라는 목소리, 뒤를 돌아보는 이츠키, 그를 응시하는 히로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이 신은 ‘러브레터’에서 가장 신비로운 대목이며, 히로코가 로맨스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세상을 떠난 연인이 사랑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은 이츠키의 부치지 못한 편지에 있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2.16 00:13

  • [그 영화 이 장면] 보디가드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최근 30주년을 맞이해 재개봉한 ‘보디가드’(1992)는 새삼 세월의 속도를 느끼게 한다. 케빈 코스트너는 이 영화부터 중후한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당대 최고의 팝 스타였던 휘트니 휴스턴의 첫 영화이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 이 영화를 본다는 게 더욱 애틋해진다.   그영화이장면 흥행작이긴 했지만 사실 ‘보디가드’가 호평을 받은 영화는 아니었다. 휴스턴의 연기력 논란이 있었고, ‘스타워즈’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작가로 유명한 로런스 캐스던의 솜씨치곤 시나리오에 구멍이 많았다. 감독의 연출력도 평범했다. 무엇보다 ‘보디가드’는 진부했다. 항상 위험에 노출된 고독한 보디가드, 스토킹에 시달리는 톱스타, 의뢰인과 피의뢰인이라는 형식적 관계, 서로에게 이끌리는 두 사람, 스타를 노리는 위험한 상황과 보디가드의 희생, 예정된 헤어짐…. ‘보디가드’는 익숙한 즐거움을 위한 영화이며, 관객은 ‘길티 플레저’를 즐기듯 빠져든다.   그리고 예상했던 장면이 등장한다. 공항에서의 이별 키스 신이다. 원형 트래킹 숏으로 현란하게 담아낸 이 장면엔 1990년대 할리우드의 가장 유명한 주제가인 ‘I Will Always Love You’가 흐른다. 이 뻔한 엔딩이 좀처럼 잊히지 않은 건 단연 음악의 힘 때문이며, 여기엔 휘트니 휴스턴이라는 뮤지션의 세월을 타지 않는 위대한 목소리가 깃들어 있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2.09 00:15

  • [그 영화 이 장면] 리멤버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이일형 감독의 ‘리멤버’는 첫 장면의 카 액션 장면처럼 거침없이 질주하는 영화다. 80대 노인인 한필주(이성민)의 복수극인 이 영화는 제거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하나하나 그들을 없애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필주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누이는 친일파와 일본인에 의해 죽고 미쳐가고 끌려갔다. 그는 평생 그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왔고, 이제 때가 왔고 시간이 많이 남진 않았다. 죽여야 할 자들 역시 고령이며, 필주는 기억을 점점 잃어가기 때문이다.   리멤버 ‘리멤버’는 잊지 말아야 할, 하지만 점점 사람들이 잊어가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필주의 알츠하이머 병은 ‘망각의 역사’에 대한 메타포인 셈인데, 여기서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하려 한다. 그 절박함은 손가락에 새긴, 척살해야 할 자들의 이름을 새긴 문신으로 잘 나타난다. 그는 한 사람을 죽일 때마다 문신 위에 칼로 ‘一자’를 그어 나간다. 대기업 회장, 대학 교수, 자위대 퇴역 장성,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퇴역 장군까지, 부와 명성을 지녔지만 그 죄를 씻을 수 없는 자들의 리스트. 그리고 ‘필살’(必殺)이라는 두 글자. 그렇다면 네 명의 죽음으로 그의 복수는 완성되는 걸까.   하지만 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수는 이어진다. 필규의 총에 새겨진, 일본어로 ‘기요하라’인 ‘淸原’이라는 한자. 그는 누구일까. 어쩌면 가장 오랫동안 새겨져 있던, 이 영화의 숨겨진 비밀 같은 이름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2.02 01:08

  • [그 영화 이 장면] 우수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오세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수’의 서사는 그다지 극적이진 않지만 그 안엔 수수께끼가 있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죽음을 이야기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사장(윤제문)은 홀로 집에 앉아 술을 마시며 후배(김태훈)에게 전화한다. “나 오늘 죽을 거야.” 그리고선 후배에게 조문 올 거냐고 묻는다. 그리고 다음 날, 사장은 전화를 받는다. 대학 동창 철수가 죽었다는 부고다. 그는 후배에게 함께 광양의 장례식장까지 가자고 하고, 여기엔 과거 사장의 연인이었으며 철수와 삼각관계였던 은주(김지성)가 동행한다.   우수 일반적으로 영화의 중심은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이고, 영화 장면들은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데 ‘우수’는 그렇지 않다.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고, 느슨하게 연결된 장면이 모여 죽음의 아우라를 만든다. 죽을 거라던 사장은 친구의 부고를 듣고, 죽은 이의 환청을 듣고, 망자가 살아 있다는 이상한 꿈을 꾼다.   여기서 반복되는 이미지가 있다. 액자다. 텅 빈 액자는 마치 누군가의 사진을 기다리는 듯하다. 이후 액자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이번엔 채워졌다. 철수? 아니, 사장의 얼굴이다. 마치 영정사진 같다. 그렇다면 혹시… 죽은 사람은 철수가 아니라 사장이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는 죽은 주인공의 유령이 꾸는 꿈 같은 건 아닐까? ‘우수’는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그 안에서 묘한 판타지, 혹은 ‘서사의 수수께끼’를 만든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1.25 00:31

  • [그 영화 이 장면] 오마주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지난 11일 열린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드에서 남녀 배우를 통틀어 수여하는 베스트 퍼포먼스 부문 수상자는 ‘오마주’의 이정은이었다. 이정은은 런던아시아영화제에서도 배우 부문 수상을 했으니, 올해 국제적으로 가장 성과를 거둔 여성 배우인 셈이다. 그의 첫 주연작인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는 영화에 대한 영화다. 이정은은 영화감독 지완으로 나오는데, 세 번째 영화까지 내리 흥행에 실패한 상황에서 제안을 받는다. 한국의 두 번째 여성 감독이었던 홍은원의 ‘여판사’(1962)라는 작품 복원 작업이다.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영화의 사라진 조각을 찾기 위해 지완은 동분서주한다.   그 영화 이 장면 결국 찾아간 곳은 지방의 어느 허름한 극장이다. 극장주가 모자 사업을 했다는 그곳 영사실엔 수많은 모자가 쌓여 있지만 ‘여판사’의 흔적은 없다. 여기서 작은 반전. 오래전 상영이 종료된 영화의 필름은 잘라서 모자챙으로 재활용되곤 했는데, ‘여판사’ 프린트도 그렇게 사용됐던 것이다. 지완은 빛 아래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미지를 확인하는데, 이때의 표정은 ‘오마주’에서 이정은의 ‘베스트 퍼포먼스’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절제돼 있고 일상적이며 정적이지만 이 장면만큼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드러낸다. 단 일차원적으로 터트리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얼굴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감정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환희의 표정. 연기의 완급 조절은 이런 것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1.18 00:20

  • [그 영화 이 장면]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박송열 감독이 아내 원향라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부부로 등장하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이하 ‘낮덥밤춥’)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30대 부부인 영태(박송열)와 정희(원향라)는 매일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직장이 없는 그들은 각종 아르바이트와 일시적인 일자리를 전전하지만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집세와 각종 공과금만으로도 빠듯하고, 빚을 내야 하며, 부모님 생신에 용돈도 못 드린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정서는 궁핍하지 않다. 영태와 정희의 삶은 의외로 여유 있고, 삶의 퀄리티를 고려하며, 가난을 이유로 양심과 도덕을 저버리지 않는다. ‘낮덥밤춥’은 도시의 옥탑방에 사는 가난한 부부가 아니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남녀의 이야기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여기서 소개할 장면은 영화 속이 아니라 밖에 있다. 바로 ‘낮덥밤춥’의 현장 사진이다. 엔딩 크레디트를 유심히 본 관객이라면 놀랄 것이다. 이 영화의 현장 스태프는 단 두 명, 박송열과 원향라 부부였다. 그래서 영화의 모든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되었고, 조명과 편집과 녹음도 그들의 몫이었다.   촬영 기간은 3개월. 영화 속 캐릭터처럼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제작비를 마련하며 찍지 않았나 싶다. 영화 제작 방식과 작품 내용이 겹치며 미학을 형성하고 리얼리티를 만들어낸 ‘낮덥밤춥’은 그런 점에서 진정한 자급자족 독립영화인 셈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1.11 00:15

  • [그 영화 이 장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대니얼 콴과 대니얼 쉐이너트 감독이 함께 연출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는 평행 우주에 대한 가장 독특한 영화일 것이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SF이면서, 양자경 주연의 쿵후 영화이며, 악취미가 줄줄 흐르는 코미디이고, 무엇보다도 가족 영화인 ‘에에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편 웨이먼드(케 호이 콴)가 아내 에블린(양자경)에게 우산을 씌우면서 급변한다. 수많은 세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에블린은 점프를 통해 그곳을 이동하고, 그러면서 영화의 세계관은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며, 남편은 물론 딸 조이(스테파니 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셀 수 없는 ‘또 다른 그들’이 뒤엉킨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어느 세계에선 셰프로, 어디에선 배우로, 혹은 쿵후 고수로 살아가는 에블린. 그에겐 수많은 ‘나’가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돌’의 정체성이다. 인간이 되기 전 무생물 상태인 에블린은 역시 돌로 존재하는 딸 조이와 어느 세계에서 만난다. 여기서 ‘돌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정신없이 달리던 영화의 휴식 같은 대목이다. 아웅다웅하던 모녀는 돌이 되어서야 비로소 서로 위로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주는 얼마나 넓으며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돌들의 해탈한 듯한 농담은 계속 이어지고 “하하하” 웃음소리로 마무리된다. 의외의 울림이며 묘한 감동을 주는 신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1.04 00:33

  • [그 영화 이 장면] 카사블랑카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시간이 지나도 의미와 가치가 꾸준히 발견되는 작품을 클래식이라 한다면, 최근 재개봉한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카사블랑카’(1942)는 그 전형일 것이다. 개봉된 지 80년이 지난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 영화엔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카사블랑카’는 사실 새로울 것이 없는 영화다. 멜로드라마의 판에 박힌 설정으로 가득 찬, 진부함의 집대성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형성이 오히려 이 영화를 위대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남과 여, 전쟁의 급박한 상황, 예상치 못한 이별, 더욱 예상치 못한 재회, 다른 사람의 연인이 된 그녀, 그리고 또 한 번의 이별. 이 스토리라인은 동서고금 관객들에게 호소력을 지녔던 서사이며, ‘카사블랑카’는 이 뻔한 이야기를 가장 멋있고 세련되고 아름답게 전달한다.   카사블랑카 특히 공항의 이별을 담은 마지막 장면은 잊을 수 없다. 릭(험프리 보가트)은 사랑했던 여인 일자(잉그리드 버그먼)를 떠나 보내려 한다. 릭의 표정은 무심한 듯 비장하고, 일자의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이때 릭은 말한다. “이렇게 지켜보고 있잖아(Here’s looking at you, kid).” 우리에겐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이라는, 거의 창작에 가까운 번역으로 알려진 이 대사는 영화에서 네 번에 걸쳐 반복되는 그들 사이의 밀어이자 암호 같은 문장이다. 그리고 일사에 대한 릭의 이별사이기도 하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0.28 00:14

  • [그 영화 이 장면] 블레이드 러너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1980년대를 대표하는 레전드 SF인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1982)가 최근 40주년을 맞아 재개봉했다. 개봉 당시 배급사의 무자비한 편집으로 엉망이 되었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E.T.’(1982)에 밀려 고전했던 이 영화는 10년 후인 1992년이 돼서야 디렉터스 컷으로 비로소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2007년에 파이널 컷이 나왔으니, 영화가 선보인 지 사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된 셈이다.   블레이드 러너 배경은 2019년 로스앤젤리스.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리플리컨트(복제인간)를 잡으러 다니는 ‘블레이드 러너’다. 로이 배티(룻거 하우어)는 행성을 탈출해 지구에 침투한 리플리컨트의 리더이며, 데커드의 표적이다. 배티의 목적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 자신을 만든 타이렐(조 터켈)을 만나지만, 배티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영화엔 수많은 명장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데커드와 배티가 맞닥트리는 후반부는 영원히 회자할 것이다. 이른바 ‘빗속의 눈물’로 불리는 이 장면에서, 수명을 다한 리플리컨트 배티는 죽음을 맞이하며 독백한다. 영화사상 가장 감동적인 죽음이라 불러도 될 광경 속에서 배티는 말한다. “난 네가 상상하지 못할 것을 봤어. (중략) 그 기억이 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배티는 고개를 숙이고, 이때 비둘기가 날아간다. 마치 그의 영혼처럼.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0.21 00:09

  • [그 영화 이 장면] 젊은 남자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과거의 한국영화가 재개봉하는 건, 이젠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1994)도 그중 한 편이다. 28년 전에 나온 이 영화는 이정재의 첫 영화이며, ‘배창호 프로덕션’의 창립작이다. 그리고 지금 관점에서 보면, 당시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오렌지족’ 문화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문화인류학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젊은 남자 영화는 록 음악과 함께 도로를 질주하는 카메라로 시작한다. 길 한가운데엔 전복된 채 불타는 자동차가 있고, 거기서 내린 남자는 풀썩 쓰러진다. 이 장면은 클라이맥스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젊은 남자’는 파국을 먼저 보여주고, 그 파국으로 가는 남자 이한(이정재)의 욕망을 보여주는 영화인 셈이다.  이한은 젊은 육체를 밑천으로 스타가 되려는 청춘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지금의 감각과 물질적 욕망이며, 성공을 위해 달려간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가 바로 질주다. 록 카페에서 만난 멋진 여성을 옆에 태우고 오픈카를 몰며 도로를 달리는 이한의 모습은 그 시절 많은 20대들이 선망했던 캐릭터이며, 이른바 미디어를 통해 재생산되었던 ‘신세대’ 문화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젊은 남자’는 그 질주를 멈추고 몰락의 풍경을 보여준다. 성공에 중독된 젊은 남자의 마지막 신.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1985)의 허망한 엔딩을 연상시키는 장면이기도 하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0.14 00:16

  • [그 영화 이 장면] 헌트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배우 이정재의 연출 데뷔작 ‘헌트’는 1980년대 초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안기부 해외팀을 이끄는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을 이끄는 김정도(정우성)의 관점으로 보여준다. 이야기와 제작 규모 모두 블록버스터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압권은 헤드 카피다. ‘대통령을 제거하라’. 10년 전 ‘26년’(2012)이 있긴 했지만 ‘헌트’처럼 직설화법으로 돌진하진 않았다.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화국 출범, 그리고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과 이웅평의 남한 귀순과 아웅산 폭탄 테러까지 ‘헌트’가 픽션을 더해 다루고 있는 사건들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그 중심엔 영화에선 ‘천수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지난해 90세로 세상을 떠난 독재자가 있다. 여기서 영화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대통령을 죽이려는 세력들의 작전과 충돌과 연대를 보여준다.   영화 '헌트' 그렇다면 가능할까. 히틀러를 무참하게 죽이며 일종의 ‘대체역사’를 제시했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까진 아니더라도 ‘헌트’는 과감하다. 테러 현장에서 대통령의 머리에 겨눈 총. ‘그때 그 사람들’(2005)이나 ‘남산의 부장들’(2020)이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사실적 재현이었다면, ‘헌트’는 스파이 액션이라는 장르의 힘과 팩션이라는 서사의 힘을 빌려 그 직전까지 다다른다. 그렇다면 과연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까. 영화가 사실과 싸우는 지점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10.07 00:16

  • [그 영화 이 장면]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조금 뜬금없지만, 재개봉으로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영화가 있다. 2009년에 개봉했던 부지영 감독의 첫 장편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13년 만에 다시 만나는 신선함이다. 젊은 관객에겐 낯설 수도 있지만, 개봉 당시 이 영화는 적잖은 충격을 선사했다. 혹자가 “‘식스 센스’ 이후 최고의 반전”이라고도 했던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자매의 화해를 다룬 흐뭇한 드라마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겐 진정 느닷없었다.   그 영화 이 장면 영화는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빠가 다른 자매 명주(공효진)와 명은(신민아). 명은은 언니 명주에게 자신의 아빠를 함께 찾으러 가자고 한다. 오래전 자취를 감춰 기억이 나지 않는 아빠. 남아 있는 건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엄마와 아빠와 언니가 찍은 가족사진 한 장뿐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조금은 심심한 가족영화처럼 느껴지지만,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절대로 누설해선 안 될 강력한 스포일러를 지닌 영화다. 단서는 명은 없이 세 사람만 함께한 바로 그 사진.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로드 무비인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결국 그 모든 사연이 이 사진 한 장으로 수렴되어 응축된다.   명은이 아빠라고 알고 있는 사진 속 이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그는 어린 딸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일까. 왜 명은의 기억 속엔 아빠가 없는 것일까. 그 모든 비밀을 이 사진은 품고 있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09.30 00:26

  • [그 영화 이 장면] 사랑은 비를 타고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전설의 뮤지컬이 재개봉된다. 스탠리 도넨과 진 켈리가 공동 연출하고 켈리가 주연을 맡은 ‘사랑은 비를 타고’(1952)다. 올해 70주년이 되는 이 영화는 ‘라라랜드’(2016)나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뮤직비디오처럼 최근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뮤지컬 장르의 모든 것이자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는 완벽한 엔터테인먼트다.   사랑은 비를 타고 진 켈리와 도널드 오코너의 춤과 당시 신인이었던 데비 레이놀즈의 풋풋한 매력이 잘 어우러진 이 작품은 흥겨운 음악과 수많은 명장면의 연속이다. 특히 진 켈리가 ‘싱잉 인 더 레인(Singin’ in the Rain)’을 부르며 거리에서 춤추는 대목은 영화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장면이다. 문 앞에서 키스를 나눈 연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고, 진 켈리는 거리에 홀로 남았다. 그의 몸과 마음은 로맨스의 여운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에너지를 발산하듯 비 오는 거리에서 춤을 춘다. 우산 하나와 오로지 배우의 개인기로 만들어진 이 장면은 약  3분 30초 동안 이어지는, 영화사상 가장 행복한 러닝타임이다. 마치 모든 것을 성취한 듯, 억누를 수 없는 감정으로 단순하면서도 섬세하게 조율된 춤을 추는 진 켈리는 퍼포먼스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원래는 세 명이 함께할 예정이었지만 진 켈리가 솔로를 고집했는데, 컨셉트는 단지 ‘빗속에서 노래하며 걷는다’ 정도였다고. 촬영 당시 그는 39도 고열에 시달렸다고 한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2022.09.23 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