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경제위기 처한 EU에 노벨 평화상 … 엇갈린 유럽 표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12일 유럽집행위원회(EC) 조제 마누엘 바호주 위원장(왼쪽)이 EU 주재 노르웨이 대사로부터 노벨 평화상 축하 꽃다발을 받고 EC 본부로 들어서고 있다. [브뤼셀 AP=연합뉴스]

유로존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 유럽 27개국 5억 명의 공동체인 유럽연합(EU)이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평화상은 노벨상 중 유일하게 개인이 아닌 기관이나 단체도 받을 수 있다. 지역 공동체가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토르비에른 야글란 위원장은 12일(현지시간) “EU는 60년 넘게 유럽 대륙의 평화와 화합,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대륙에 다시 평화를 가져오는 데 EU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70여 년 동안 세 번의 전쟁을 벌인 독일과 프랑스지만 오늘날 두 국가는 가까운 파트너로서 서로를 침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미스터 유럽’ 헤르만 반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EU는 역사상 가장 큰 평화 조성자”라며 “EU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EU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이 최근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세계 경제마저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EU에 평화상을 주는 것이 적절하냐는 것이다. 특히 독일이 그리스와 스페인 등에 긴축재정을 요구하면서 EU 내 갈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9일(현지시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유로존 위기 이후 처음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 5만 명이 몰려들어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날 노벨위원회의 발표 직후에도 독일과 그리스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독일은 정치인들이 축하 논평을 쏟아내는 등 환호했다. 메르켈 총리는 “EU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더 노력하라는 격려”라며 “유로화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리스는 주요 언론이 EU가 평화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거나 단신 처리하는 등 시큰둥했다.

 영국의 보수 정당인 영국독립당 당수 나이젤 파레이즈는 “지난 2년 동안 EU는 남유럽과 북유럽 사이에 엄청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고 비판했다.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러시아의 인권운동가 류드밀라 알렉세예바(85)는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이어 EU에 평화상을 주느냐”고 지적했다.

 야글란 위원장 역시 이런 비판을 예상한 듯 “유럽이 지금까지 이뤄온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메시지”라며 “만약 EU가 무너지도록 놔둔다면 무엇을 잃게 될 것인지를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르웨이 공영 NRK방송은 “이번 평화상 수상은 유로존 위기로 수렁에 빠진 EU를 격려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평화상은 노벨상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문이다. 1973년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레득토 북베트남 대표가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레득토는 “베트남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한 것이 대표적이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노벨위원회가 수상자를 발표하기 1시간 전에 노르웨이 TV가 웹사이트에 “평화상 수상자는 EU”라고 게시해 유출 논란이 일었다. 올 평화상엔 43개 기관을 포함해 231후보가 추천됐다. 상금은 800만 크로네(약 13억원). 다른 노벨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상하지만 평화상만은 노벨이 숨진 때를 기념해 매년 12월 10일 오후 4시30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EU를 대표해 상금과 메달을 누가 받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