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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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은 1912년 일제 치하의 대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10세의 나이로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대구화단의 선구자 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때의 일이었다.

2년뒤인 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하며 화단에 입문했다.

주위의 후원으로 31년 동경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을 하고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졸업장은 물론 없다.

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 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 등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특히 수채화에서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했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대조, 그리고 불투명의 짧고 단속적인 붓터치로 유화의 수준에 비견될만한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조선미전에서 데뷔후 8년간 '카이유'(32년) '가을 어느날'(34년)을 비롯,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35년) 등 무려 12점의 입선과 6점의 특선을 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35년 귀국한 그는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 김옥순과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게된다.

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됐으나 이듬해 순경과 사소한 언쟁끝에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아깝게 요절한다.

그에 대해서는 관전(官展)을 발판으로 한 출세지향적, 타협적 작가, 자기양식을 확립하지 못한 절충적 작가라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한 이인성에게 활동무대가 관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여러 화집을 참조하면서 독학한 이인성은 서구의 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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