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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에 부는 ‘하산론’ 바람 … 부럽지만 부질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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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청춘의 문(門)』은 일본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80)가 쓴 대하 장편소설이다. 일제(日帝)시대 규슈의 탄광촌에서 태어난 이부키 신스케의 성장 과정을 청춘의 방랑과 탐색에 초점을 맞춰 총 7권으로 밀도 있게 그려냈다. 42년 전 첫 출간 이래 일본에서만 2200만 부가 팔렸다. 뒤늦게 국내에서 번역돼 올 초 1, 2권이 나왔고, 최근 3, 4권이 출간됐다. 요 며칠 이 소설을 읽으며 마음을 사로잡는 거장(巨匠)의 흡인력을 실감하고 있다.

 이쓰키가 펴낸 에세이집 『하산(下山)의 사상』이 요즘 일본에서 화제라고 한다. 지난해 말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지금까지 20만 부 넘게 나갔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지위에서 밀려남으로써 일본이 하산길에 접어든 현실을 인정하고, 안전하게 내리막길을 밟아 내려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쓰키는 하산길에 접어든 현실을 외면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까지 미군이 상륙했음에도 패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제국주의 국민정서와 다를 게 없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일본을 강타한 3·11 대지진을 계기로 일본 내 일부 학자들 사이에 ‘탈(脫)성장론’이 제기돼 왔다. 『성숙일본, 경제성장은 더 이상 필요 없다』를 쓴 하마 노리코(浜矩子) 도시샤(同志社)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채권 보유국이자 경제·사회적 인프라를 갖춘 성숙국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엔화 강세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게 분명한데도 성장론에 매달릴 경우 신흥국들과의 수출경쟁 때문에 근로자들은 저임금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결과 내수 부족에 따른 불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장을 당연시하는 관성적 사고 탓에 매년 3만 명 이상이 자살하는 등 국민이 불행해지고 있다는 이쓰키의 생각과 맥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하산론’에 대한 성장론자들의 반론도 뜨겁다.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대 교수는 “일본이 찾아야 할 길은 새로운 등산로 입구에 다다르는 하산로가 돼야 한다”며 “성장을 포기하면 재정 유지가 불가능해져 경제·사회 인프라까지 붕괴된다”고 경고한다. 성장의 과실을 맛보지 못한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산꼭대기에서 누릴 것 다 누려본 노년 세대의 배부른 소리라며 하산론에 야유와 냉소를 보내고 있다.

 큰 일을 겪고 나면 인생관이 바뀌듯이 동일본 대지진의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일본 사회에서 하산론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산하자고 해서 아예 성장을 멈추자는 주장은 물론 아닐 것이다.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자전거 페달을 최대한 천천히 밟자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정상은 고사하고 7부 능선에도 못 올라가 본 우리로서는 부러우면서도 부질없는 논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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