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한·미 FTA 덫에 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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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통합당이 양 갈래 길목에서 고민에 빠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서다. ‘집권 후 폐기’ 주장에 대해 ‘너무 나가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강공을 펴기도, 그렇다고 갑자기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이런 분위기는 15일 한명숙 대표의 취임 한 달 기자회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 대표는 회견문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빼곡히 나열하면서도 유독 한·미 FTA에 대해선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취재진이 질문을 던지자 그제야 “치밀하고 정밀하게 전면 재재협상을 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신경민 대변인은 “질문이 나올 것 같아 회견문에서 따로 언급을 안 한 것뿐”이라며 “앞으로도 FTA 얘기는 많이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당 일각에선 ‘FTA 폐기론’의 반향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고 너무 앞서나갔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로 인해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FTA 폐기를 주장하는 세력엔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비판하고, 이명박 대통령까지 ‘국격’을 문제삼아 가세하면서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이다. 총선기획단의 한 관계자는 “박 위원장과 이 대통령이 오랜만에 합세한 것만 봐도 총선 구도를 FTA 문제로 돌리려는 의도가 읽힌다”며 “우리가 여권의 덫에 걸린 측면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스스로 부각시킨 이슈인 만큼 수습도 민주통합당 몫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당내에서도 8일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벌인 ‘집권 후 FTA 폐기’ 서한 전달식부터 ‘스텝이 꼬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쓴 편지에서 “재집권하면 FTA를 폐기하겠다”는 언급이 국민들의 눈에 지나치게 오만하게 비쳤다는 분석도 있다. 새누리당에서 “이미 총선에서 이긴 듯 굉장히 오만해졌다”(남경필 의원)는 말도 이를 반영한 비판인 셈이다.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지도부도 시위 참석을 끝까지 고민했다”며 “막상 일을 치르고 보니 생각보다 논란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FTA를 모른 척하거나 반대 공세의 줄을 늦추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출구전략을 세웠다가는 통합진보당과 ‘선명성’ 경쟁에 밀려 야권연대의 주도권을 내줄 수도 있다. 한 대표가 “서민에게 피해를 주는 FTA를 찬성하는 세력에 정권을 맡길 수 없다” “재협상이 전혀 안 된다면 폐지할 수밖에 없다”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도 이런 고민에서다. 또 정부 예고대로 오는 3월 한·미FTA가 정식으로 발효되면 민주당의 ‘출구’가 자꾸 좁아지는 것도 고민거리다.

양원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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