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룡의 행복한 은퇴 설계] 여행 가랴 친구 만나랴 하루가 빡빡…당신은 ‘수퍼노인 증후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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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소장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김모(62)씨는 2년 전 서울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공무원연금 월 220만원과 서울 집을 정리한 돈으로 고향에서 노후생활을 시작하니 걱정할 것이 없다. 은퇴 후 소일거리를 위해 퇴직하기 전 동호회 세 군데에 가입했고, 친구들과도 수시로 만나다 보니 하루가 바쁘다. 사교생활이 어찌나 활발한지 매월 지급되는 연금으론 생활비가 부족할 정도다. 지난달에는 국내여행을 두 차례나 다녀오는 바람에 아내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못해 한바탕 다투기도 했다. 이 정도면 모든 은퇴자들이 꿈에 그리는 생활이다. 충분한 연금과 활발한 여가활동으로 한가할 틈이 없는 노후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은퇴생활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점이 있다. 첫째로 지나치게 바쁘게 생활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은퇴한 사람들이 흔히 겪게 되는 심리적 증상 중 하나가 ‘잠시도 한가해서는 안 된다’는 ‘수퍼노인 증후군’이다. 모처럼 찾아온 인생의 자유에 새로운 의무를 만들어 입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취미와 여가활동이란 본래 생의 보람과 환희를 위한 것인데, 시간 때우기식의 활동을 늘어놓은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로 노후생활을 한두 가지 방향으로만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은퇴 후 삶의 행복은 가족, 취미나 여가, 건강, 사회활동 등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찾아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행복 포트폴리오’를 잘 꾸미지 못한 채 은퇴를 맞는다. 회사형 인간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은퇴자들은 가족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방법이 서투르다. 또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TV 앞에 하루 종일 붙어 있기도 하고, 나이에 맞지 않는 과격한 운동으로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그보다는 은퇴 후 가장 취약할 수 있는 분야인 사회활동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봉사와 기부를 통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려 볼 것을 권한다.

 셋째로 인생 후반기에 찾아오는 간병기에 대한 대책이 미흡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후생활의 후반 10% 이상을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보낸다. 따라서 간병기에 드는 거액의 의료비와 요양경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저축을 해야 한다. 은퇴생활 초반에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비용을 지출하다 보면 이후 의료비와 간병 비용 등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이는 노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이미 은퇴한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고민해야 하는 주제다. 그중에서도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늘 쫓기듯 사느라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조차 없는 삶은 어딘가 허전하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은 도태나 일탈이 아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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