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현대아산 의장 사재출연 배경]

중앙일보

입력

현대의 실질적 오너인 정몽헌(MH)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이 25일 사재출연이라는 `깜짝 카드'를 들고 나왔다.

사재출연은 정부.채권단이 그동안 경영부실을 책임지는 최선의 해법으로 제시해 온 것으로 오너인 정 의장이 이에 적극 `화답'하는 형태를 띰으로써 시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재계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정 의장의 사재출연 방침이 자금난에 처한 현대건설의 자구노력에 의미있는 `활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동성 위기 와중에도 해외로 잠행했던 정 의장이 뒤늦게 경영부실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은 뭔가 다른 배경이 깔려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소폭 매각'으로 사재출연의 모양새를 갖추면서 지분이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경영일선에 복귀하려는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 현대측이 설명하는 배경 = 현대가 거론하는 사재출연 배경은 현대건설의 유동성 지원으로 압축된다.

즉 현대건설이 한푼이 아쉬운 상황인 만큼 자구노력의 하나로 정 의장의 사재출연을 검토하게 됐다는 것.

특히 정부.채권단이 강도높게 주문하고 나선 만큼 `성의표시'가 불가피했다는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그러나 종전 정부.채권단의 사재출연 요구에 대해 헌법까지 들먹이며 `사유재산 침해'라고 주장해 온 현대가 태도를 돌연 바꾼 이유로는 뭔가 충분치 못하다는 시각이다.

정부.채권단으로부터도 압박을 받았다는 특별한 징후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 현대건설 정말 어려운가 = 외견상으로는 현대건설의 자구노력이 순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자금사정은 긴급하다는 징후가 있다는 시각이 있다.

현대건설은 이번주중 이라크 미회수 채권중 일부를 분납형태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이라크 당국의 태도변화로 상황이 여의치 못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라크 채권회수 문제는 이미 금융감독원에 보고된 사안인데다 채권단이 주시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를 벌충하기 위한 또다른 `빅카드'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SOS'를 타전받은 정 의장이 고육지책으로 사재를 내놓았을 것이라는게 현대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현대건설이 24일 정주영 전명예회장의 지분매각 대금 2천억원을 회사채 대신 CP(기업어음) 매입에 긴급히 활용한 것은 자금사정이 여의치 못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게 현대의 설명이다.

◇ MH 그룹 지배 포기하나 = 일부에서는 MH의 이번 선택이 얼마만큼 실현되느냐에 따라 오너 지배체제가 와해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5월31일 부친인 정 전명예회장의 동반퇴진 선언에 따라 대표이사직을 내놓은 뒤 `소유권'인 사재마저 출연함으로써 그룹과의 `끈'을 떼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정 의장은 이달초 일본에서 돌아온뒤로 대북사업외에 그룹현안에는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특히 핵심브레인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사퇴가 불가피한 국면에 처해 그룹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에 회의를 느낀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정반대의 시각도 있다.

재벌가의 속성상 선뜻 그룹 지배권을 내놓을리 만무하고 오히려 `적정지분율'을 확보, 경영일선 복귀를 위한 수순을 밟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 MH 경영복귀 수순 아닌가 = 가능성의 일단은 MH의 지분이동에서 엿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MH는 전자지분 1.7%중 일부를 팔아 상선지분 23.86%를 가져오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건설 유동성 지원이 명분이지만 뜯어보면 이번 사재출연은 그룹 지주회사를 건설에서 상선으로 옮기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MH는 자신이 최대주주로 있는 건설의 지분을 통해 상선을 장악하고,상선은 중공업.전자.증권.상사.아산 등의 최대주주가 되는 형태로 그룹을 지배해 왔
다.

그러나 상선으로 지분을 대거 이동시킬 경우 굳이 건설을 거치지 않더라도 상선을 통해 직접적인 그룹지배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만의 하나 건설이 자구노력에 실패, 워크아웃되더라도 지배구조에는 변화가 없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결국 지배구조의 `새판'이 짜여지는 셈이다. 현대주변에서는 몇가지 근거를 들어 MH의 경영복귀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우선 정몽구 현대차 회장(MK)이 명실상부한 자동차 소그룹의 출범을 눈앞에 두
고 있는데 `자극'을 받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이와 함께 그동안 MH `대역'으로 그룹을 진두지휘하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사퇴할 경우 `힘'의 공백이 생겨 그룹 지배력이 크게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익치 회장이 내주초 공식 사퇴를 선언하고 장기외유에 들어갈 것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은 현재 미국 AIG로부터 1조2천억원의 외자유치 대가로 현대증권 지분 50%를 넘기는 협상을 진행중이다.

◇ 문제는 규모와 방식 = 사재출연이 어느 규모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느냐에 따라 MH의 정확한 의도가 파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 의장의 사재는 ▲건설 2천47만339주(7.82%.629억원) ▲전자 835만8천998주(1.7%.1천880억원) ▲상선 505만3천473주(4.9%.210억원) ▲상사 89만4천95주(1.22%.18억2천만원)▲정보기술 9천816주(0.04%.1억6천만원).

현대 주변에서는 MH가 지배구조를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지분률을 유지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에 따라 MH의 사재출연 규모는 수백억원대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MH가 상선을 통한 그룹지배를 구상하고 있다면 건설지분 일부와 상사.정보기술 지분을 내놓을 것으로 관측된다.

방식도 엄밀한 의미로 `무상기부'를 의미하는 사재출연이 될지, 단순히 투자처를 옮기는 사재출자가 될지 아직까지 미지수다.(서울=연합뉴스) 노효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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