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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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선 중기 시인 간이(簡易) 최립(崔)의 시구에 “섣달그믐 지새는 술은 모름지기 초주와 백주라네(小歲觴須椒柏)”라는 것이 있다. 초주(椒酒)와 백주(柏酒)는 새해 첫날 마시는 술이다. 당(唐)나라 서견(徐堅) 등이 편찬한 『초학기(初學記)』 ‘사민월령(四民月令)’조에는 산초의 꽃이나 열매로 담아 정월 초하루 집안 어른에게 올리는 술이 초주라고 전하는데, 장수를 비는 술이다. 측백나무 잎으로 만든 백주도 나쁜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어른의 장수를 비는 술이었다. 그래서 새해 첫날 마시는 술을 장수를 빈다는 의미로 수주(壽酒)라고 한다.

 궁궐 화가들의 관청인 도화서(圖署)에서는 새해를 축하하는 세화(歲)를 그려 바쳤다. 『중종실록』 5년(1510)조에 세화는 60장을 넘지 않았다는 기록은 도화서의 연말이 세화 그리기로 바빴음을 말해준다. 세화를 바치면 감정안이 있는 신하들이 등급을 나누어 최상등은 궐내에 붙이고, 나머지는 재상과 근신(近臣), 지방 관아에 나누어주었다.

 세화의 화제(題)는 태상노군(太上老君), 성수선녀(星壽仙女), 직일금장(直日金將) 등으로 대부분 장수와 건강을 비는 것이다. 가장 많이 그린 화제는 십장생(十長生)이다. 고려 말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세화십장생(歲十長生)’이라는 시는 고려 때도 십장생을 세화로 그렸음을 말해준다. 이색은 십장생을 “구름, 물, 소나무, 대나무, 지초(芝·영지버섯), 거북, 학, 사슴”이라고 풀이하면서 “병중의 소원은 오래 사는 것만 한 게 없다”고 장수를 희망했다. 조선 초기 문신 성현(成俔)의 문집인 『허백당집(虛白堂集)』에도 ‘세화십장생을 하사받고(受賜歲?十長生)’라는 시가 있어서 조선 초기에도 십장생이 세화로 애용됐음을 알 수 있다.

 세조 재위 원년(1456) 왕비 윤씨는 세화 대신 백성의 일상을 그린 사민도(四民圖)를 붙이려고 하다가 세조가 반대하자 “백성에게서 밥이 나오고, 옷이 나오는데, 붙여놓고 보는 것이 왜 안 됩니까?”라고 따져서 허락했다고 『세조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전한다. 단종은 물론 단종을 따르던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그 가족까지 노리개로 삼았던 인간 백정 비슷한 삶을 살았던 세조지만 궐내 야당이 존재했던 셈이다.

 새해에는 청와대뿐만 아니라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모든 노블레스의 집무실에 현대판 사민도를 붙여놓고 이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고민한다면 조금은 더 나은 임진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