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시각장애인 시드니 '햇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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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경쟁자들의 숨소리가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희미한 움직임을 따라 달려나가야 한다.

시각장애인 말라 루니안(31·여)은 여느 때 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다.올림픽에 나가싶은 육상선수이기 때문이다.

4백m 트랙을 두바퀴 돈 중반까지는 선수들 사이에서 페이스를 맞췄다. 세바퀴 이후 루니안은 전력을 기울여 결승선을 향해 내달렸고 주위의 환호로 3위를 한 것을 깨달았다.

여름과 겨울대회를 통틀어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본선에 진출할 시각장애인 선수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루니안은 17일(한국시간)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미국 육상 대표 선발전 여자 1천5백m에서 4분06초44를 기록했다. 국가별로 3명씩 출전할수 있는 올림픽 A기준 기록(4분08초F)을 너끈히 통과한 것이다.

두손을 번쩍 들어 기쁨을 만끽하는 루니안을 시드니행 티켓을 함께 따낸 레지나 자콥스(1위·4분01초01)와 수지 페버-헤밀튼(2위·4분01초81)이 축하했다.

루니안은 “내 시력은 장애가 아닌 주어진 환경에 불과하다”며 “올림픽에 출전한 최초의 시각장애인이기 보다 그저 올림피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9살 때 망막세포가 퇴화하는 증세를 겪은 뒤 주변의 움직임만을 감지하는 시각장애인이 된 루니안은 이를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1992년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에서 1백·2백·4백m와 멀리뛰기 4관왕에 올랐으며, 96년 패럴림픽에선 5종 경기 우승을 차지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96년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 7종 경기에 출전, 10위를 차지한 뒤로 자신감을 얻은 루니안은 실격 위험이 적은 중·장거리에 치중했다.

그는 루니안은 지난해 팬암 대회 1천5백m에서 우승했고 같은 해 세계 선수권 대회 1천5백m 결승에서 4분06초45로 10위에 오르며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선발전을 앞둔 지난달 루니안은 연습중 자전거를 탄 아이를 피하기 위해 발을 잘못 내딛는 바람에 왼쪽 다리에 근육통이 왔다.결국 지난 16일 예선전까지 연습을 한 차례도 못했다.

그렇게 따낸 동메달이어서 루니안은 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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