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열광 사회의 가벼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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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34면

우리는 하루 중 상당한 시간을 인터넷 세상에서 머문다. 포털 사이트를 시작으로 네트워크에 접속해 그 창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접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의도나 선택과는 무관하게 하루 또는 주(週) 단위로 떠오르고 사라지는 인물들을 본다. 숱한 사람이 또 그만큼 빠르게 잊혀진다. 우월한 외모·능력에 대한 찬사인 이른바 ‘여신’ ‘종결자’로 등극하는 이도 한둘이 아니다. 이제는 그 표현이 주는 강렬함조차 무뎌질 지경이다.

과거에 ‘영웅’이란 비범한 능력과 성취의 주인공들이었다. 천재적 발명가, 구국지사, 탁월한 지도자 등 시련과 역경을 딛고 위업을 이룬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요즘엔 현실감 없는 상상 속의 위인들보다 일상 속에서 늘 마주하는 ‘우리’와 같은 보통의 존재들에 더 이끌린다. 마냥 올려다보는 경외의 눈길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보는 파놉티콘적 시선의 권력을 즐긴다. 그런 시선으로 매체가 만드는 우상들의 소소한 일상사에 몰입하고 탐닉한다. 이 시대의 우상이란 주시와 모방이 가능하며, 우리의 기호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조작적 모델일지 모른다.

최근 범람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이런 우상의 속성과 대중의 생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프로그램 시작부터 참가자들이 생존을 위해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는 단계마다 대중은 그들을 평가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며 ‘지켜보는 욕구’를 충족한다. 그들의 개인사와 오디션 과정의 일화들을 통해 대중은 모든 이야기의 생산과 소비에 참여한다. 그들에 의해 선택되고 만들어진 새로운 우상들은 대중의 시선과 감시, 동경과 부러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대중의 심리는 늘 변화하는 데다 다양한 취향 간의 궁극적 합의도 이뤄지기 힘들다. 생활방식, 취향, 가치관, 삶의 모델 등에 따라 소비 품목이 세분화되듯 우상들도 연령·취향·계층별 그룹에 따라 선택되고 소모되고 버려진다. 끊임없이 일회성 우상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장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성으로 묘사한 ‘대서사(meta-narrative)의 종언’은 종전까지 인류 역사를 지배하고 이끌어온 보편적 원리와 목표, 도덕·윤리·가치관 등 모든 총체적 사상에 대한 회의와 거부를 의미했다. 이제 획일적 가치와 사고를 강요해온 근대적 사고와 담론 대신 서로 다른 ‘소서사(narrative)’들이 개인들의 삶을 조직한다. 과거의 영웅들이 제시하던 보편적 가치와 삶의 모델이 오늘날엔 상업 매체를 통해 뿌려지는 숱한 우상의 사소한 이야기로 채워지듯 말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모범적 삶의 주인공에 대한 훈훈한 뉴스가 종종 전해진다. 타인을 위해 희생한 순교자, 애써 모은 전 재산을 사회에 쾌척하는 할머니, 입양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며 사랑으로 키워내는 부모…. 그들에게 우리는 찬사와 존경을 표한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에서 그런 존경은 동경과는 별도의 감정이다. 그들에 대한 존경이 그 삶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동경의 대상이 꼭 존경의 이미지를 표상하지도 않는다.

이 시대의 우상들은 존경보다 동경의 대상에 가깝다. 그들의 일상에 집착하고, 습관적으로 기웃대며, 끊임없이 새로운 우상을 탐색하는 행위들은 그들이 보여주는 멋진 삶에 대한 환상과 기대 이상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우상으로 칭송하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들의 삶에 대한 동경에 불과하다면, 우상을 통해 발전하는 내면적 성숙은 기대하기 어렵다.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 분리되는 것은 개인적 삶의 방식과 목표 설정에 혼란을 야기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대서사’를 지니지 못한, 우리 시대의 소비적 우상들이 갖는 불완전함과 한계다.



궁선영 고려대에서 소비문화에 대한 연구로 2009년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 연구교수를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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