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마흔 잔치 … "그냥 허구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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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도발, 그래 도발이었다. 십년쯤 전 시인 최영미(사진)에겐 '도발'이란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하고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을 침 뱉 듯 읊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지금도, 작가 말마따나 징그럽게 생생하다.

그러나 시인은 한동안 소식이 뜸했다. 두번째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가 나온 게 98년. 그 뒤로 산문집 등에서 드문드문 그의 이름을 본 것도 같다. 그러더니 불쑥, 소설을 썼다며 나타났다. 지난 4년 시인과 소설가 사이에서 싸우느라 꼼짝도 못했다고 했다. 소설가 최영미(43)씨의 첫 작품은 '흉터와 무늬'(랜덤하우스중앙). 200자 원고지 1300매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형식상 책은 각각의 줄거리를 가진 짧은 글 137편의 묶음이다. 이 짧은 글이 포개지고 더해져 하나의 줄거리를 이룬다. 삶은 원래 불연속적인 것이라고,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건 하나의 장면일 뿐이라고, 그래서 흩어진 삶의 장면을 그러모아 하나의 삶을 만들어 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소설은 '정하경'이란 작중 화자의 여섯 가족이 한국전쟁부터 1970년대까지의 굴곡 심한 가족사를 담았다. 실연의 아픔에 허덕이던 화자가 어릴 적 심장병으로 숨진 언니의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그러나 허구로만 읽히지 않는다. 작중 화자는 실제 시인과 너무 닮았다. 그러나 작가는 "절대 자전적이지 않다"고 강조했다. "개인적인 경험이라도 작가가 썼다면 허구"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믿기로 했다.

다만 주인공은 작가와 생년월일이 같고, 태어나고 자라난 시.공간적 배경이 같다. 소설에서 묘사한 가족 관계는 94년 그의 시에서 본 그대로다. '평생 당신이 갖지 못한 것만 꿈꾸신 아버지/자잘토실한 근심들로 광대뼈만 움푹 살진 어머니/…/징그럽게 애비 꿈, 에미 잠 축내는/아귀 같은 딸년들 하나, 둘, 셋'-'우리집'부문.

막 서른을 넘겼을 때 시인은 한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마흔을 넘어선 오늘 소설 한 권을 내놨다. 작가는 "이제야 혹독하게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 본다"고 했다. 삶의 새로운 한 단계를, 그는 넘어선 듯하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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