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3. 소학교의 명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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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춘천으로 전학가기 전 양구 소학교 1학년 때 찍은 단체사진. 화살표 돼 있는 아이가 필자다.

1926년 3월 15일, 나는 배춘흥(裵春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강원도 양구군 북면 본리, 지금은 이북 땅이 된 곳이다. 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한 진사이셨다. 그래서 그 일대에선 '진사댁'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집안이었다.

내가 태어나면서 달라졌다. 동네 사람들은 '진사댁' 대신 '앉은뱅이네'라고 불렀다. 태어난 지 두 돌이 넘도록 내가 걸음을 못 뗐기 때문이다. 엉덩이로만 방 안을 훔치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꽤 약았던 모양이다. 걷지만 않으면 누군가 업어준다는 걸 터득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태어나던 날에도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다. 어머니는 혼자서 나를 낳았고, 탯줄도 직접 잘랐다고 하셨다. 무심한 아버지는 밖으로만 나돌아 다녔다. 화가 난 어머니는 갓 태어난 나를 안고 아버지를 찾아 무릎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이웃 사람이 보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나는 그때 얼어죽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양구 읍내에 소실을 두고 있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는 아예 읍내에다 따로 살림을 차렸다.

맏형이 집안의 기둥이었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할 때 맏형은 춘천에서 지금의 고등학교 과정을 고학으로 마쳤다. 그리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맏형은 참 알뜰했다. 꼬박꼬박 돈을 모아 어머니께 부쳤다. 화천댐이 생기는 바람에 우리집은 춘천으로 이사했다. 나는 전학한 춘천 혼마치(本町)소학교(지금의 춘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소학생 시절, 나는 학교에서 명물로 통했다. 유명한 배우의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춘천 시내에 들어오는 서커스단의 공연도 빠짐없이 찾아갔다. 당시 춘천에는 극장이 '읍애관(邑愛館)' 하나 뿐이었다. 그곳에서 올리는 악극도 나를 피해가진 못했다. 어머니 주머니를 뒤지기는 예사였다. 아니면 극장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표를 사는 어른들의 바지를 붙들었다. "아저씨, 손 좀 잡고 들어가 주세요." 나중에는 아예 '상습범'으로 지목됐다. 극장 사람들은 모두 내 얼굴을 꿰고 있었다. 이후로는 극장 담을 타고 화장실 창으로 들어갔다.

소학교를 졸업할 때 중일전쟁이 터졌다. 맏형은 회사를 따라 일본 도쿄에 가 있었다. 형은 나를 일본으로 불렀다. 그리고 도쿄에 있는 니치보쓰(日沒) 중학교(6년제로 지금의 중.고등 과정)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5학년 때 조기 졸업해야 했다. 문제는 군대였다. 나는 입대를 피하려고 운송회사의 트럭 조수로 취직했다. 군수품 공장과 운송 계약을 맺은 회사라 징병 문제에 혜택이 있었다. 나는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이리저리 입대를 피했다. 그렇게 버티다가 광복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로 귀국했다. 부산에 도착해 열차를 탔다. 서울까지 꼬박 이틀이나 걸렸다. 차가 없어 춘천까진 트럭을 얻어 타야 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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