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엔고 대책 ‘언 발에 오줌’… 시장 냉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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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엔화가치의 초강세에 일본은행이 긴급 진화에 나섰지만 오히려 불길은 확산되고 있다. 엔화 값이 다시 치솟고, 주가는 연중 최저치로 떨어졌다. 일본은행의 대책이 엔고를 막기엔 역부족이란 인식이 시장에 퍼지면서다. 지난달 30일 일본은행은 임시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정책금리(0.1%)로 은행에 대출해주는 자금의 규모를 기존 20조 엔에서 30조 엔으로 확대했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도 9200억 엔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제시했다. 시중에 돈을 풀어 엔화 값 급등세에 제동을 걸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쌍끌이 대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차갑다. 일본은행의 발표 전 달러당 85.91엔으로 떨어졌던 엔화가치는 발표 직후 오히려 반등하기 시작했다. 31일 오후 도쿄 외환시장에서 다시 달러당 84.1엔대까지 올라섰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재무상이 “외환시장이 일방적으로 쏠리고 있다. 필요할 땐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엔화 값 상승은 증시에도 충격을 줬다. 이날 도쿄증시의 닛케이 평균주가지수도 개장과 동시에 추락하기 시작해 전날보다 3.55% 급락하며 연중 최저치(8824.06)로 밀려났다.

시장을 얼어붙게 한 건 엔고 대책이 이미 알려진 내용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실망감이다. 나카하라 노부유키 전 일본은행 이사는 31일 “대책의 규모가 너무 작은 데다 시기도 너무 늦었다”면서 “엔고를 막는 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금도 시중에 자금이 많이 풀려 있는 상태라 돈을 조금 더 푸는 정도로는 엔고를 막기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경기침체에 초저금리에도 돈을 빌리려는 곳이 없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라는 얘기다. 일본은행의 자금 공급은 지난해 말 이후 늘고 있지만 일본 은행들의 대출은 8개월째 감소세다.

게다가 미국에서 달러를 더 푸는 방식의 추가 부양책이 나오면 달러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예상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의 초저금리로 일본과의 금리 격차가 좁혀진 것도 엔화 강세를 이끌고 있다.

이러다 보니 엔화에 대한 투기적 수요도 늘고 있다. 솔로몬투자증권 임노중 연구원은 “엔화 강세는 일본 경제의 여건이 좋아서가 아니라 유동성이 만들어 낸 것”이라며 “중국이 외환보유액 다변화로 엔화 보유 비중을 늘리고 있는 데다 투기적 수요까지 가세하면서 엔화가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엔고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일본 경제에 드리운 먹구름도 더욱 짙어지고 있다. 2분기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전 분기 대비 0.1%에 그쳤다. 그나마 성장률이 다시 마이너스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수출 증가세가 유지된 덕이지만 엔화 초강세에 수출에도 빨간 불이 켜진 상태다.

여기에 소비자물가는 지난달까지 17개월 연속 하락했다. 나카하라 전 일본은행 이사는 “정책금리를 0%로 떨어뜨리고, 일본은행이 추가 채권 매입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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