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大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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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선은 끝났다. 하지만 송년회에서만큼은 끝나지 않았다. 주안상 앞의 열띤 토론은 선거가 아직도 진행 중인 듯싶다. '노무현·이회창'이 입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나같이 정치 전문가다. 토막 뉴스까지 꿰고 있다. 소주 소비량은 예전의 배(倍)였으나 안주는 들여올 때 그대로다. '盧·李'라는 술안주가 있으니 따로 돈들여 주문하지 말 것을 그랬나 보다.

"이래 가지고 어떡하겠다는 거야… 정말 고생들 해봐야 해." "어디가 어때서. 20·30대 얘기할 것 없어, 우리 '꼰대'들이 정신 차려야지." 평소 거절하던 폭탄주를 자작하며 핏대를 올리는 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盧당선자의 '세상을 확 바꾸는' 시책에 입맛을 다시던 친구가 되받는다.

"하기야 자식들도 애비 말을 안듣는데…." "그건 그렇더라도 광주 95.3%는 뭐야. 전남은 93.4였나. 몇 대에 걸쳐 공덕을 쌓아도 90 넘기기가 어려울텐데. 이래 놓고 지역감정 해소 좋아하네. 쉬쉬한다고 덮어질 일인가." "대구 77.8은 작은가. 매한가지지." "충청도는 어떻고. 그렇게 DJP인가에 속고도 행정수도인가 뭔가에 홀랑 넘어가서… 보수 원조를 자처하던 JP의 처신이라니."

"왜 멀쩡한 동네는 들먹거려. 제 손 갖고 제 맘대로 투표도 못하나." 나이에서 지역 감정으로, 주먹다짐만 없지 전원이 어우러진 싸움판이다. 30년 전 지역 대결까지 들먹이는 논쟁은 한이 없다. "선거 얘기 그만하자"는 제의가 끝나기 무섭게 대화는 다시 선거로 이어진다. "盧가 고향에서도 깨진 이유를 잘 봐야 돼. 이민이나 갈까봐."

"昌은 고향이라던 충청에서 안깨졌나."

"미국이 재채기만 해도 된몸살을 앓는 우리 처지에 반미가 어쩌고 저쩌고. 부시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야." "그렇다고 밤낮 기면서 살아야 하나." 도대체 말린다고 끝날 계제가 아니다.

"나라 살림을 저 모양으로 그르쳐 놨는데 또 정권을 잡게 했으니 앞으론 막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양자 들여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누군들 국사 걱정할까."

"그런 상대한테도 졌으면 말을 말아야지."

"진 게 아니야. 광주 표를 봐도 음모가 있던 게 틀림없어." "안 졌다면? 음모 좋아하네. 반성할 생각은 않고."

"선거 막바지 촛불시위를 보더라도 뭔가 있던 게 분명해. 노사몬가 바이러슨가 하는 걸 봐. 선거날까지 제 멋대로야. 선거법이고 뭐고 없더라니까."

"젊은이들이 우리보다 나아. 아날로그로 디지털을 이길 수 있나. 전략을 잘 짠 거야."

"그건 그래. 한나라 전략이 틀려 먹었어. 정몽준 건은 그렇다치고, 광고 문안 하나를 봐도 헛짚더라니까."

19일 이후 10여차례 참석한 이런저런 송년회는 매번 이랬다. 말싸움 순서만 일부 다를 뿐, 똑같은 각본에 따라 모임을 진행한 게 아닌가 의아스러울 정도다. 선거는 아직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은 분명 끝났다. '급진·모험주의'를 미리부터 걱정할 게 아니라 제대로 일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盧당선자도 절반 국민의 우려와 의구심을 덜 수 있게끔 차분히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건강한 보수가 있을 때 합리적 진보도 가능하다. 지난 일일랑 송년회에 파묻어 버리자. 이제는 내일을 말하자.

논설위원

hi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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