頂上회담에 준비도 없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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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5일 캄보디아 프놈펜 인터콘티넨털 호텔에 한국의 김석수(金碩洙)국무총리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이 모였다. 한국과 아세안 국가 간의 경제협력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金총리는 회의 시작부터 태국·싱가포르 총리 등의 공세에 직면해야 했다. 중국과 일본이 아세안과의 자유무역지대 창설에 적극적인데 반해 한국은 미온적이라는 지적이다. 싱가포르 고촉통(吳作棟) 총리는 "한국은 칠레와는 FTA를 체결했으면서 아세안과의 논의에는 소극적"이라고 꼬집은 것으로 전해졌다.

金총리는 "아세안과 FTA 체결할 준비가 아직 안됐다"면서 "한국은 아직 농업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농어민의 동의를 구하기 전에는 아세안과 FTA 체결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를 붙였다. 그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중장기적으로 연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원론적인 말을 하는 데 그쳤다.

결국 중국·일본과 아세안이 '동아시아 FTA 체제'구축을 서두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농민들의 반대 때문에 FTA 체결이 어렵다"고 거절한 셈이다.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창설 방안은 지난해 11월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金대통령이 기조발언을 통해 제안한 것이다. 그것을 金총리가 "어렵다"고 한 것이다. 외교적 미숙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관계자는 "한·아세안 간 FTA 체결은 현지 진출 기업을 통한 수출 증진과 동아시아 경제권 내에서의 한국의 영향력 확대 등 긍정적이라는 내용의 용역보고서를 외교통상부에 제출했다"며 "정부는 칠레 다음으로 일본·멕시코와 아세안 국가를 FTA 추진 대상으로 꼽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의아해 했다.

정부 내에서도 "金총리의 이 같은 답변은 FTA 문제를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며 "총리실이 정상회의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점검해봐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보통 FTA는 협상을 시작해 체결에 이르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사안"이라며 "정상회의에서 농민들의 반발을 이유로 FTA 체결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mode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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