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 달동네'난곡'18개월후]난곡 전세살이서 반지하 월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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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부모가 걱정할까봐 아파도 참고 말하지 않던 아이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사람들, 그래도 자활의 꿈을 꾸며 서로를 부축하던 도시의 유랑민들.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서울 관악구 신림7동 산101번지 일대 속칭 '난곡'의 실상을 중앙일보가 보도한 지 1년6개월이 지났다. 지금 난곡은 재개발 물결 속에 대부분의 가옥이 철거됐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조차 버거워하던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취재팀은 '난곡 현장 리포트'를 보도할 당시 독자에게 약속한 대로 다시 난곡을 찾았다. 한림대학교 부설 신림사회복지관(관장 김현용)과 공동으로 난곡을 떠난 주민들을 40여일간에 걸쳐 추적했다. 이를 통해 재개발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했다.

편집자

김순희(가명·53·여)씨는 현재 난곡 초입의 다세대주택에 산다. 창문만 땅 위로 나온 반지하 방이다. 저축한 돈에다 몇 푼 안되는 이주비, 그리고 친척들에게서 돈을 빌려 월세 보증금을 마련했다.

"셋방 구하느라 빚만 늘었지요. 월세에 난방비까지 예전보다 생활비가 훨씬 많이 들어 저축은 꿈도 못꿔요. "

金씨는 지난해까지 이곳 산꼭대기에 위치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8평짜리 집에 살았다. 당시 그의 소망은 한발짝이라도 산 아래 버스 종점 쪽으로 내려가 사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난곡 주민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린이들조차 "저 아이는 밑(아랫동네)에 사니까 옷 입는 것도 다르다"며 보이지 않는 벽을 쌓기도 했다.

그런 金씨로선 단박에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나 아랫동네에는 엄청난 생활비, 만만찮은 물가, 그리고 무엇보다 구직난이란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고교생 자녀 두 명을 둔 그의 월 수입은 정부의 저소득층 지원 보조금 23만원, 재활용품을 수집·판매해 마련하는 30만원 등 53만원이 전부다.

"차라리 산꼭대기 시절이 그리워요. 비록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며 한숨도 쉬었지만, 그때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저축을 하며 희망을 키울 수 있었는데…. "결국 재개발은 金씨에게 생활고를 가중시킨 셈이 됐다.

본지와 신림사회복지관이 난곡에 살던 1백52가구를 찾아 설문조사한 결과 이주 전엔 8%에 그쳤던 월세 가구가 이주 후에는 48%로 6배나 늘었다. 집값이 비싼 탓이다.

예전에는 10명 중 3명꼴로 얼마간 저축을 했지만, 지금은 10명 가운데 9명이 빈 통장이다.

반면에 빚은 이주하기 전보다 가구당 4백만원 가량 늘었다. 철거 전이라면 이 돈은 난곡에서 전세방을 얻을 수 있는 거금이다.

주민들은 이처럼 생활이 더 어려워진 이유로 주거비 급증(83%)을 꼽았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서울 전역을 들쑤신 집값·전세 파동이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조사 대상자 대부분은 여전히 난곡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다.

인근 공공임대아파트에 입주한 사람(47%)들을 제외하고는 상당수가 지하 또는 반지하(26%)에 살고 있다. 옥탑방이나 상가·식당에 딸린 방에서 기거하는 경우도 있다. 산에서 내려온 이들의 상당수가 지하·반지하로 들어간 것이다.

조흥식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재의 재개발 정책은 중산층의 잔치마당으로 전락했다"면서 "원주민의 소득수준을 감안해 최소한의 주거를 보장할 수 있도록 사회주택의 공급을 늘리고 장기융자제도를 도입하는 등 국가적인 주거권 보장 대책이 재개발정책과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찬 기자

wolsu@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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