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에 무덤덤한 美증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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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노출된 재료는 더 이상 재료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적어도 이 곳 뉴욕증시에서 이라크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전쟁 가능성이 불거진 후 수 개월이 지났건만 시장은 여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엔 백악관이 후세인 대통령의 제거까지는 밀어붙이지 않을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월가는 다소간 안도하고 있다. 때를 같이 해 잇따라 발표된 3분기 기업실적도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말 랠리에 대한 기대감을 서로들 키우려고 애쓰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 악재가 터졌다. 수년째 핵개발을 추진해 왔다고 시인한 것이다. 이곳 신문들도 많은 우려를 지면에 담아 냈다. 이라크 하나만으로도 벅찬 부시 정권에 북한까지 덤벼드니 골치를 썩이게 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워싱턴 정가의 매파 목소리도 당연히 시장에 전달됐다. 그런데도 월가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별 무반응이었다. 북한이 핵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한 건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적어도 뉴욕 증시에선 무시되는 수모를 당했다.

장이 좋아지고 있다는 신호일까. 악재가 힘을 쓰지 못하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투자자들은 북핵 문제를 대단한 악재로 분류하지 않는 것 같다. 일단 백악관이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힌 것이 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백악관의 이같은 입장 표명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나온 반응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핵문제가 언젠가 시장을 짓누를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북한과 이라크를 보는 월가의 시각은 큰 차이가 있다. 이라크에 비해 북한은 국지적이란 것이다.

이라크전쟁 하면 중동과 이스라엘, 그리고 석유가 떠오르지만 북한과의 전쟁은 가능성 자체가 낮다는 얘기다. 한·중·일이 북한을 에워싸고 있는 지정학적 입지로 볼 때 미국이 북한을 쉽게 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월가의 무반응엔 북한의 핵 개발 시인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위협용이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뭘 좀 얻어내겠다는 협상용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월가의 이런 분석이나 추측들은 북한 정권에 귀한 참고가 될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이 의도한 대로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싶다면 말이다.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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