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국제 석유질서 '재편' 노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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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얼마 전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의 회견 기사에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무기 산업과 석유 자본을 즐겁게 하려는 동기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이라크 공격의 비밀스런 동기는 바로 '검은 황금'이라고 지적했다. 만델라와 이코노미스트 모두 '석유 요인'이 이라크 공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라크는 석유 대국이다. 확인된 매장량만 1천1백25억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다. 여기에 개발 안된 것(2천2백억배럴 추정)까지 합하면 사우디를 능가한다. 또 품질이 뛰어나며 채굴 비용이 적게 먹혀 수익성이 높다. 석유 전문가들은 "이라크에 관심을 갖지 않은 석유 회사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도 이라크는 미국의 주요 석유 공급원이다. 하루 약 1백만배럴을 수입함으로써 전체 수입량의 9%, 수입선 가운데 6위를 차지한다.

미국은 이라크 석유를 사활적 이익으로 판단한다.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설립한 베이커공공정책연구소가 지난해 4월 백악관에 제출한 '21세기 에너지정책 보고서'는 이라크가 중동 석유의 국제시장 공급에 불안 요인이 되고 있으며, 석유 무기화와 수출 조절을 통한 유가 조작으로 미국이 수용할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있으므로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하루 2천만배럴을 소비하는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 미국은 현재 전체의 절반을 수입 석유에 의존하고 있으며, 2020년엔 3분의2로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 석유회사들은 그동안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경제제재로 불이익을 당해왔다. 이라크 석유는 1927년 이래 영국과 미국 석유회사들이 장악해 왔으나 72년 이라크의 석유 국유화로 기득권을 상실했다. 특히 91년 걸프전 이후 후세인 정권이 러시아·프랑스·독일·일본·중국·인도 석유회사들에만 특혜를 줌으로써 이대로 가면 이라크 석유로부터 영영 배제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껴왔다. 현재 이라크는 비(非)미국·영국 석유회사들과 30건 이상의 대규모 개발 계약을 해 놓고 있으며, 일부 지역은 이미 개발에 들어간 상태다.

이라크 공격에 미국 석유회사들의 입장이 고려됐을 것이라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부시 행정부는 석유 자본과 가깝다. 한때 석유 회사를 소유했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딕 체니 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도널드 에번스 상무장관 등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 41명이 석유회사 출신이거나 대주주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미국이 후세인 정권 타도 후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는 해외 반(反)후세인 세력이 과거 후세인 정권이 맺은 모든 계약은 무효며, 미국 석유회사들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사실이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이라크의 석유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확보할 것이다. 이라크 석유에 세계 4위 매장량의 쿠웨이트,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진출한 중앙아시아·카스피해의 석유까지 합하면 미국은 세계 에너지 수급 체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를 통해 미국의 오랜 숙제인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카르텔을 무력화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라크 공격은 '국제 석유 질서' 재편이라는 대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정우량 국제전문기자

chuw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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