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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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바벨탑이 무너지고 나서일까.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는 다른 종족의 말을 통역 또는 번역할 필요를 느껴왔다.

구약성경(에스더서)에도 그런 기록이 나온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재상 하만이 "유대인을 모두 죽여라"고 명령했다. 왕비 에스더가 소식을 듣고 놀라 아하수에로 왕에게 유대인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왕이 부인의 말을 받아들여 재상의 명령을 철회시켰다. 이 왕명을 전달하는 과정이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1백27개 주(州)의 유대인과 대신과 방백과 관원에게 전할 때 각 주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과 유대인의 문자와 방언대로 쓰되…'(에스더서 8장9절)라고 표현돼 있다.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이 소년시절 처음 목격한 영어글자는 성냥갑에 인쇄된 'TRADE MARK'였다. 동네 '신지식인'에게 물었으나 "발음은 '트라데 말크'인데 뜻은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school'과 'listen'의 발음이 왜 '스추울'과 '리스텐'이 아닌지 그야말로 심각한 '도우브트(doubt)'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문주반생기』·양주동)

'프랑스어로 사랑을 속삭이고 독일어로 신을 이야기하며 영어로 연설하고 러시아어로 꾸짖는다'는 말이 있지만, 문제는 사랑이고 신이고 간에 해당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 다음의 이야기란 점이다. 요즘에도 '미친 영어'나 '영어공부 하지마라' 등 외국어 학습을 둘러싼 숱한 방법·비결과 성공담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외국어를 익히는 데는 기본적으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수다. 일본의 대표적인 동물행동학자이자 어학의 천재로 불리는 히다카 도시타카(日高敏隆)의 경우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을 1백% 외국어 공부에 투자해 훗날 20개국어에 유창하게 된 인물로 유명하다.

똑같은 노력이라면 해당국에 유학하거나 원어민 강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외국어 학습의 능률을 더욱 높인다. 북한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멀쩡한 이웃나라 시민을 바닷가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해 어학 강사로 부린 북한의 처사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만행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망동(妄動)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며 일본 총리에게 사과했다지만, 북한의 '망동'이 이 한가지뿐일까.

노재현 국제부차장

jaik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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