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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랩 어카운트’ 판매 허용 신중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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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요즘 금융권에서 돈 되는 상품이라면 단연 ‘랩 어카운트’(맞춤형 자산관리계좌)가 꼽힌다. 고객이 높은 수익에 만족해하고 판매 금융회사는 짭짤한 수수료 수입으로 재미를 본다.

증권사가 주로 취급하는 이 상품은 고객 계좌에 주식·채권·펀드 등을 넣어 맞춤식으로 포장(wrap)해 준다.

랩 상품은 최근 일부 증권사가 투자자문사들과 손잡고 ‘7공주’ 등으로 불리는 소수 주식에 집중 투자해 30~40%의 고수익을 내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1년 전 13조원대였던 랩 어카운트 계약자산은 현재 28조원 규모로 배 이상 커졌다. 랩 상품의 수수료는 연 2~3%로 주식형펀드 수수료(평균 1.9%)보다 높다.

이처럼 돈이 되다 보니 은행들이 “우리도 팔아야겠다”고 나섰다. 정부도 규제완화 차원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은행에 대한 랩 상품 허용은 지난 2008년 추진됐으나 갑작스러운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뤄졌던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은행에 이 상품을 주는 게 맞는지, 위험요소는 없는지 신중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은행들의 취급 능력이 도마에 오른다. 가까운 예로 펀드판매 허용 이후 은행의 행태를 돌아보자. 수수료 수입을 올리는 재미에 캠페인식으로 펀드를 팔았다. 은행 직원들은 예·적금 고객에게 “저금리로 만족할 수 있나. 지금은 펀드가 돈이 된다”고 떠벌렸다. 파급력은 대단했다. 수천 개의 은행 점포가 움직이자 수십조원의 자금이 펀드로 이동했다.

미래에셋 펀드의 폭발적 판매도 국민은행이 움직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은행창구의 직원들은 펀드 투자의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당연히 고객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증시가 주저앉자 많은 고객이 손해를 봤고, 불완전 판매를 둘러싼 금융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랩 어카운트는 펀드보다 훨씬 위험한 상품이다. 몇 개의 주식 종목을 놓고 치고 빠지는 투자전략을 구사하기 일쑤다. 정부가 10여 년 전 랩 상품을 허용한 것 자체가 증권사 창구의 주식 일임매매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은행들은 “증권사와 다른 개념으로 접근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주식보다는 예금·펀드·골드뱅킹 등 안전한 자산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짜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은행들은 프라이빗뱅킹(PB) 창구를 통해 이런 영업을 이미 하고 있다. 고객 계좌의 개별 상품별로 수수료나 거래마진도 꼬박꼬박 챙기고 있다. 그렇다면 랩이란 타이틀을 걸고 포장 수수료를 한 번 더 받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말이 그렇지 일단 취급 인가를 받으면 고수익을 위한 주식편입 유혹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은행들은 씨티나 UBS 등 미국·유럽 은행들도 랩 상품을 취급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선진국들도 금융위기 이후 은행의 백화점식 금융상품 취급의 위험성을 면밀히 따져보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국내 은행의 랩 상품 판매는 금융지주회사 설립 취지에도 역행한다. 선진국에선 은행이 모든 금융업무를 망라한다. 이와 달리 한국은 금융지주회사가 은행·증권·보험사 등 계열사를 거느리고 서로 협력해 영업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지주회사 입장에서 산하 은행과 증권사가 랩 상품을 동시에 취급하며 경쟁하면 비효율과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은행이 랩 상품을 판매하면 큰돈이 증시로 흘러들고, 인기 종목 중심의 주가 차별화는 더욱 심해질 공산이 크다. 또 하나의 거품이 우려된다. 거품이 꺼진 뒤 시장은 황폐해지고, 그 고통은 금융 소비자들이 떠안게 될 것이다.

김광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