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총리는 공석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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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치권의 온 관심이 오늘 치러지는 재·보선의 승부에만 쏠려 있는 사이에 정부의 국정운영에는 구멍이 커져가고 있다. 지난주에 국회가 장상 총리지명자의 인준을 거부한 이래 우리 정부는 총리가 없는 상태로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한편으로는 별다른 실권이 없는 총리 자리가 당분간 비어 있는 사실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첫 여성 총리지명자를 거부한 국회의 당파적 경쟁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모습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총리직의 공석은 우리의 정부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주는 것으로,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정파적 다툼에 골몰할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직의 유고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사실은 민주화 이후에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대통령과 아울러 총리직을 두고 있는 우리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제 정부형태의 일반적인 패턴과는 상이한 것인데, 그 배경에는 우리 나름의 굴곡있는 역사가 깔려 있다. 박정희 대통령 이래로 권위주의 체제의 대통령은 모든 권력을 한손에 틀어쥔, 문자 그대로의 제왕적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에 따르는 책임은 가능한 한 분산시키기를 원했다. 여기에서 바로 그 호칭부터 민망한 이른바 '방탄총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들은 자신을 대신해 국정실패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총리를 필요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명망가와 지도적 인물들이 별다른 권한은 없이 대통령이 져야 할 책임을 대신 떠맡는 역할을 해왔다.

지난주에 있었던 장상 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의 내용, 그리고 그에 따른 총리직의 공석에 대한 무관심은 바로 우리가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의 방탄총리, 대독(代讀)총리의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총리지명자에 대한 청문회가 줄곧 지명자의 국정수행 능력보다 개인의 과거와 도덕성에 초점을 맞췄던 것은 바로 민주화 시대의 국회가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의 방탄총리에 대한 청문회를 진행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위주의 시대와 결별한 우리는 이제 방탄총리와 작별하고 총리직을 폐지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총리직의 폐지보다 오히려 총리직의 실질화에 있다.

권위주의 체제는 물러갔지만 아직도 우리의 대통령이 갖고 있는 권한은 너무나도 넓고 강력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해 보인다. 이러한 광범한 권한을 한 개인이, 그것도 민주적인 방식과 절차를 통해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왕적 대통령들은 수많은 권한에 파묻혀 국정운영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 실패했고, 이는 특징없는 정부의 반복으로 이어져왔다. 다시 말하자면, 민주화 이후 우리의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과부하가 걸린 제왕적 대통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왕적 권한을 지닌 대통령들이 분명한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몇 가지의 중대한 분야에서 확실한 업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대통령과 총리 간의 업무 분담이 실질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예컨대 대통령은 교육 대통령을 목표로 하거나 경제개혁 대통령을 지향하는 소수의 집중된 목표에 전념하고 일상적인 정부의 일은 총리가 처리하는 역할 분담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시대의 총리가 권한은 없이 책임만을 대통령과 나눠 맡는 고된 역할을 해왔다면, 민주주의 시대의 총리는 대통령과 권한·책임을 함께 짊어짐으로써 대통령의 성공을 돕는 조력자가 돼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총리의 등장은 현재의 헌법질서 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의 정치권은 아마도 오늘 저녁이면 드러날 재·보선의 결과에 따른 새로운 정략적 계산에 몰두하느라 분주해질 것이다. 그러나 정작 국민이 바라는 대선 경쟁의 양상은 실질총리제와 같은 차기 정부의 과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분하게 토론하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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