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붉은 악마로 뭉친 교민사회 지구촌 곳곳서 "대~한민국"<워싱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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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국 공관은 전 세계에 진출해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에 있는 한국 외교관들은 주재국에 대해 뭔가 꿀리는 것 같은 심리를 갖고 있다.

미국이 워낙 대국주의에 빠져있는 데다 북·미대화, 안보지원 등 여러 현안에서 항상 아쉬운 얘기를 해야 하는 쪽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질주가 그런 한국 외교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워싱턴의 한국 외교관은 미국 관리들로부터 먼저 인사받는 일이 상쾌하고, 까다로운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축구 얘기를 할 수 있어 즐겁다.

의회 전문위원·보좌관들과 주로 씨름하는 조희용 참사관은 8강의 지난 주, 4강의 주말을 거쳐 2강의 이번 주를 기다리고 있다. 하원 국제관계위는 상원과 달리 집권 공화당이 장악해 대북 강경책을 선도하는 곳이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한 지난 18일, 경기가 끝나고 얼마 안돼 이곳의 전문위원 2명이 조 참사관에게 전화해 축하인사를 건넸다.

조 참사관은 "지난주는 미 의회를 돌아다니며 내내 즐거웠다.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데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 덕분에 미국이 8강 맛을 봤다는 인사도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이 4강에 진출한 날 저녁 양성철 주미대사는 관저에서 1965~81년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했던 미국인들에게 저녁을 냈다.

미리 예정된 행사였지만 화제는 월드컵 4강 일색이었다. 이제는 노년이 된 이들은 "60~70년대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면 4강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이날부터 한준엽 공보공사는 자택 현관 밖에 태극기를 걸기 시작했다. 그는 "이웃들은 그 뜻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며칠 전 임성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축구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아시아의 유대에도 축구는 효험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이 유럽의 축구강국 세 나라를 차례로 제치자 일본·대만·베트남 등 아시아국가 외교관들은 한국대사관에 전화나 e-메일을 보내 축하인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 일처럼 기쁘다"고 말한다.

한강의 기적, 민주주의의 성취, 외환위기의 돌파에 이어 이제 축구가 한국 외교관의 강장제가 되고 있다.

워싱턴=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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