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악의 축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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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정권이 녹화테이프 공개로 마감을 하더니, 현정권은 녹음테이프 폭로로 권력의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다.

1997년 3월이었다. 남성 클리닉 박경식 원장이 YS의 '영식님' 현철씨를 녹화했다는 비디오테이프를 경실련이 공개했다. 내용은 당시 개국을 앞둔 YTN의 사장에 민주계 金아무개 장관을 추천키로 현철씨와 청와대 정무수석이 논의한 일이 외부에 알려지자 모인사에게 전화를 걸어 경위를 알아보는 내용이었다.

5년전과 닮은꼴 폭로극

이 테이프가 방영되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뒤이어 경실련은 박경식과 김현철의 관계를 묻는 '박경식 원장 양심선언'이라는 후속 테이프를 공개했다. "호텔에서 김현철씨를 만난 인물은?" "K의원 등이 방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 장·차관은 다 인사하고 다닌다고 그러더라. 범민주계 인사가 많았다. 청와대 K비서관은 현철씨 심복이다. 부르면 달려왔다. 돈도 많이 댔다. 어느 때는 현철씨, 안기부 기조실장, 모르는 사람이 또 있었는데 다음날 신문에 그 사람이 무슨 담당으로 임명됐더라." "현철씨가 공천에도 관계했나?""깊숙이 개입했다. 신한국당뿐만 아니라 민주당 Y·H의원에겐 신한국당 상대후보를 약한 인물로 내세워 당선시켰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대통령인데 뭘 못하겠는가."

2002년 5월 최규선 육성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세상이 또 시끄러워졌고 국민의 속을 벌컥 뒤집어 놓았다. 대통령의 막내아들을 끼고 돌며 벌인 온갖 사기행각, 대통령 아들의 경영수업을 위해 대기업 총수가 동원되고 그의 사업자금을 대기 위한 주식 사주기와 그에 따른 사례금이 건네지는 등등의 행태는 97년 테이프 수준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오소 오소 오소'하며 환대하는 대통령, '권력 내 서열이 틀려져부러'진 최씨를 당대 최고의 가신이 "내가 자네의 보호막이 돼주겠네. 내 우산 속에 있으소"라며 끌어안는 대목에 이르면 비록 그것이 과장된 폭로극이었다 해도 DJ정권 내부의 권력 만화경(萬華鏡)을 한눈에 보는 듯하다.

YS와 DJ 권력은 공통점과 차별점이 있다. 두 권력이 1인지배 집단으로서 오랜 민주화투쟁 과정을 거쳐 정권을 창출하는 발생적 유사성으로 가신그룹의 득세와 개혁이라는 깃발이 자연스레 공통점으로 등장한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적과 동지를 가르며 민주화 가신세력이 똘똘 뭉치는 과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또 아들의 발호와 가신세력의 권력분점도 공통점이다. 결국 가신과 아들이 공권력을 사물화(私物化)하면서 정권이 참담한 파국을 맞는다는 점도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YS의 '영식님'은 한명이었는데 DJ의 아들은 세명이다. YS 가신들은 상대적으로 적전 분열이 적었지만 DJ 가신들은 갈등·분열구조를 보인 것도 차이점이다. 최규선 폭로 중 "당시 갈등 구도는 나·권노갑·김홍걸·이희호 여사를 한 축으로 하고 김홍일·김은성·정성홍이 반대축이었다"는 대목은 DJ 권력의 구조적 갈등을 부분적으로 암시한다. YS의 힘쓰는 아들은 혼자였기에 불만세력이 있다 해도 다른 아들에게 붙어 세력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DJ 권력의 만화경이 이렇게 복잡하고 의혹과 비리가 중첩되는 까닭은 세 아들과 가신들간의 갈등·분열과 무관치 않기에 생긴 결과라고 유추할 수 있다.

결국 그들만의 득세와 발호·갈등이 국민에게 남긴 것은 무언가. 분노와 배신, 허탈한 심정뿐이지 않은가.

"조선에서의 정권은 곧 생활이다. 권력을 잃는 것은 굶어죽는 것이다. 아사(餓死) 앞에는 이()도 비(非)도 없다. 대의도 명분도 없다. 적당(敵黨)과 싸워서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정권을 빼앗아야 한다. 싸움에 이기기 위해 당파를 조직하고 군중심리와 책임회피, 그리고 자기최면으로 당쟁을 끝까지 몰고 갔다." 1920년대 호소이 하지메라는 일본 역사학자가 조선족의 민족성이 이렇듯 당파적이라는 모멸적 식민사관을 꾸미기 위해 적은 글이다. 과연 우리 정치가 그의 모멸을 벗어날 만큼 변명할 여지가 있는가.

선동적 개혁바람 현혹말라

조폭처럼 두목 얼굴을 비치며 업소마다 돈을 뜯는 권력의 조폭화 현상, 국가 정보기관이 이편 저편에 붙어 정보보고를 하고 특수경찰이 밀항하듯 비밀을 숨겨 도망가는 공권력의 사유화 현상, 이것이 민주화고 개혁의 결과인가. 부끄럽고 참담한 이 심정을 우리가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해선 악의 축 권력구조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상식과 합리, 법과 질서가 통하지 않는 패거리 정치의 선동적 개혁과 바람에 다시는 현혹되지 말아야 악의 축을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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