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1>제101화 우리서로섬기며살자 20. 미군따라 경산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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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다음날도 친구들과 함께 미군 막사 앞에 갔는데 그 미군은 또 나만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난롯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면서 막사 안을 청소하고 총과 군화를 닦고 담요와 슬리핑백을 햇볕에 내다 말렸다. 어릴 때부터 논밭에 나가 일을 하고 나무를 했던 내게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어머니는 내가 미군에게 받아온 담배와 통조림 등을 양키시장에 내다 팔았다. 인민군들이 형님 '대신' 소와 마차를 가지고 가버렸기 때문에 우리 집은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께선 내가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것을 안쓰러워하셨지만, 아무튼 내가 벌어오는 것이 우리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중공군에 밀려 남하하는 미군들을 따라가겠다고 말하자 늦게 얻은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어머니께서 펄쩍 뛰셨다.

"전쟁통에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아 살아야지. 이제 양키 물건도 반갑잖다. 미군 따라갈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나는 미군을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그들이 버리는 물건을 줍기 위해 삼태기를 메고 부대로 갔다. 미군들은 나를 보자 또다시 함께 가자고 권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를 졸랐다.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하는 데도 계속 고집을 피우자 어머니는 "죽으려면 가라 ! "고 소리치셨다. 어머니 입에서 어쨌든 '가라 ! '는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나는 쏜살같이 달려 미군부대로 가 트럭에 올라탔다.

대전에서 하룻밤 묵은 뒤 경북 경산에 도착해 막사를 세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네 개의 막사 중 하나를 짓는 것이 나의 담당이었다. 막사 하나에 미군 20여명이 생활했다. 수원에서는 출퇴근했으나 이제 24시간 미군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진짜 하우스보이가 된 것이다.

당시 알아듣는 영어라고는 겨우 "헬로" "컴온" 정도였지만 눈치껏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미군들은 '장환'이라는 이름이 어렵다며 자기들끼리 의논하더니 나에게 빌리(Billy)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막사에서 나는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미군들의 심부름을 했다. 또 배가 출출하다는 사람에게는 계란을 삶아 나눠주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나를 귀여워하며 어떻게든 자기가 가진 물건을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어느날 한 흑인 병사가 쉬는날 한국 여자 둘을 데리고 와서 막사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게 눈에 띄었다. 다른 병사들이 다 외출하고 나만 있을 때였다. 내가 "갓댐 ! "이라고 욕을 해서 그런지 병사들이 돌아오자 그는 나를 내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모두들 내 편을 들어주어 나는 계속 일할 수 있었다.

하우스보이에겐 별도의 월급이 없다. 미군들이 닷새마다 한 번씩 받는 보급품 중에서 남은 것이 나의 노동의 대가인 셈이었다. 그때 미군 보급품에는 담배·초콜릿·커피·통조림·시-레이션·양말·속내의·파커 등등 별 희한한 물건이 다 등장했다. 나는 미군들이 주는 물건을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막사에서 나오는 빨래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맡겼는데, 빨래를 하고 나면 그들에겐 군표가 주어졌다. 군표를 모아오면 나중에 달러로 바꿔주었다. 나는 어떻게든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미군들이 내놓은 손수건이나 양말 같은 작은 빨래를 내가 직접 빨아주고 군표를 모았다.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든 학교를 다녀야 했으니까.

미군들이 잘해줬지만 가끔 어머니 생각이 나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어도 배우고 돈도 모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막사의 하우스보이들과 종종 어울리면서 미군에게서 얻은 하모니카를 불거나 시어스 로벅이라는 백화점의 카탈로그를 보곤 했다. 그 책자에는 한번도 보지 못한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있었다. 미군들이 매주 받는 보급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물건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부자 나라인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막사 앞에서 혼자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데 다른 막사의 병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너 빌리라고 하지 ? 나는 칼 파워스 상사야, 너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니 ? "

그때까지 워낙 많이 속은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지만 칼 파워스 상사는 어딘가 다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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