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9>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23) 내가 냈던 사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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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30여년의 공직 생활을 통틀어 나는 사직원을 다섯번 제출했다. 이 가운데 두번의 사직원 제출은 경제수석 재임 9개월 간의 일이었다.

그 나머지 사직원 제출은 모두 보직변경·승진·정권교체 등에 따른 것이었지, 임명권자의 신임을 물어야 할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경제수석 때 사직원 없이 구두로 사의를 표명한 적이 한번 더 있으니, 결국 경제수석 재임 기간 만큼 자주 내 거취를 임명권자에게 맡겨야 하는 때는 없었던 셈이다.

나더러 유별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요 공직자들이 그만둘 때는 반드시 그 이유를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 30여년 공직생활 내내 지킨 나의 원칙이다. 사직의 분명한 이유도 기록과 역사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흔히 하듯 '일신상의 사유'라고 사직원을 쓰지 않았다.

1989년 4월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에서 차관보로 승진하며 첫 사직원을 쓸 때(차관보는 일반직이 아닌 별정직이므로 일단 사직원을 내야한다), 나는 "정부의 인사 방침에 따라 사직원을 제출합니다"라고 썼다. 당시 사직원을 받으러 왔던 인사계장이 "이런 사직원은 난생 처음 봅니다"며 난감해했지만 나는 "사실대로 써야 한다"고 했다.

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새 정부가 출범하며 두번째 사직원을 내야 했을 때도 당시 환경처 차관이던 나는 "새 정부 인사의 원활한 운용을 위하여 사직원을 제출합니다"라고 썼다.

청와대 경제수석 때는 이미 말한 대로 金대통령에게 구두 사의까지 포함해 세번 사의를 표명했는데 두번째 사의를 표명할 때는 실제 사직원을 써서 김용태 비서실장에게 맡겼다. 그 사직원은 반려되었으나 나는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가 뒤에 또 신임을 물어야했을 때 다시 사의 표명과 함께 金실장에게 맡겼으며, 이 사직원은 바로 수리됐다.

97년 10월 29일자로 작성해 냈다가 11월 18일 다시 제출해 19일자로 수리된 사직원에 나는 이렇게 썼다. "소직(小職)은 부여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대통령 각하의 뜻을 충분히 받들지 못하고 있다고 사료되어 이에 사직하고자 합니다. 청허(聽許)하여주시기 바랍니다. 1997년 10월 29일. 위 원인(願人) 金仁浩."

97년 2월 26일 金대통령에게서 경제수석을 맡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이틀 뒤부터 시작한 경제수석 재임은 이렇게 끝났다.

9개월이 채 안되는 그 기간 중 경제가 편한 날은 하루도 없었고, 따라서 金대통령의 심기도 편할 수가 없었으며, 대통령을 모시는 경제팀도 자연히 죄송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내가 경제수석으로서 사의를 세번이나 표명했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어찌보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명권자의 신임이 없이는 강경식 부총리와 내가 팀을 이뤄 당시의 어려웠던 경제 상황을 소신대로 헤쳐나가는 데 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제수석은 법상 규정된 권한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대통령의 신임 하나를 근거로 일을 해야 하는 자리이므로, 대통령이 '다른 이야기'를 듣고 경제수석에 대한 신임이 흔들린다면 그 역할을 다 할 수가 없다.

97년 8월 말, 한 언론이 '강경식 부총리 물러나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을 때 나는 처음으로 "아, 잘못하면 부총리를 바꿀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두달 뒤인 10월 28일 밤 10시쯤 姜부총리와의 대책회의를 위해 인터컨티넨탈 호텔로 향하던 나는 金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강경식이 국회에 가서 경제의 펀더멘털은 좋다고 하던데 그 사람 그래도 되는 거야."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그리고는 11월 18일 오후. 금융개혁법안 국회 통과가 무산된 직후, 나는 金대통령 집무실로 올라가 마지막 사의를 표명했다.

금융개혁법안 무산이 어떤 의미인지, 왜 사의를 표명하는지, 그리고 경제수석으로서 무엇이 아쉬웠는지 등등을 상세히 다 이야기했지만 그때도 金대통령은 침묵했다.

그때 사의 표명에 대한 金대통령의 대답은 다음 해인 98년 3월 필자가 상도동으로 찾아갔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정리=김수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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