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숨은 표, 숨은 신, 숨은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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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왜일까. 가려졌던 민심의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돌아보면 이번 선거만큼 여러 변수들이 중첩된 선거도 드물다. 지난주 월요일 나는 민주당 의원 워크숍에 가서 선거결과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강연을 한 바 있다. ‘서민경제 침체’에서 ‘정보사회 진전’에 이르는 배경적 요인들과 ‘정권심판론’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 그리고 ‘노풍(盧風)’에 이르는 주체적 요인들이 결합된 선거라는 게 분석의 요지였다.

정치사회학적 시각에서 이번 선거에서 가장 주목되는 현상은 이른바 ‘숨은 표’다. ‘숨은 표’란 여론조사와 실제투표율 간의 격차, 여론조사에는 잡혀 있지 않으나 실제 투표로는 나타난 야권 성향의 표를 지칭한다. ‘숨은 표’가 물론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대체로 여론조사에는 야당 성향의 표가 숨어 있으며, 최근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바 있다. 이번 선거에서 유독 ‘숨은 표’가 주목되는 것은 선거 직전 마지막으로 공표된 여론조사와 비교해 그 규모가 10%를 훌쩍 넘어섰기 때문이다.

‘숨은 표’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우리 정치 현실의 이면을 보여준다. ‘숨은 표’는 단지 여론조사 기법 문제와 낮은 응답률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자기 집 전화번호가 남겨지는 조사에 응답할 경우 혹시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무응답층의 그늘 속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숨기게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미네르바 사건’ ‘트위터 논란’ 등으로 나타난 ‘표현의 자유’의 위축을 적어도 야권 성향의 유권자들은 느껴 왔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여론조사가 현실 정치에 미치는 영향 또한 중요하다. 유권자는 최종 정치적 지지를 결정할 때 아무래도 여론조사로부터 명시적·묵시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지율이 앞서는 정당은 ‘밴드왜건 효과’(편승 효과)를, 뒤지는 정당은 ‘언더독 효과’(약자 동정 효과)를 노려 여론조사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여론조사가 민심을 왜곡해 전달할 경우, 이는 결국 유권자의 판단은 물론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숨은 표’에 담긴 상징성이다.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닫힌 사회’, 다시 말해 ‘숨은 사회’로 되돌아가지 않나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숨긴 ‘숨은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이 커지며, 이는 결국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지반인 사회적 자본을 침식한다.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사회의 투명성은 점점 높아져만 가는데, 정작 그 구성원들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채 사적 왕국의 성채에 은거하는 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사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제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따른 국정 쇄신 구상에 대해 방송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두 가지다. 국민이 원하는 변화의 목소리를 더욱 귀담아듣겠다는 것과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새롭게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소통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앞서서 ‘숨은 사회’가 아니라 ‘열린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보사회의 진전에 걸맞은 표현의 자유를 더욱 존중하고, 군림하는 정부가 아니라 섬기는 정부로서의 리더십을 더욱 발휘해야 한다. 세종시 수정과 4대 강 정비를 포함한 주요 국정사업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집권의 반환점으로 나가는 현 시점에서 국정운영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성찰 및 전환이 요구된다.

‘숨은 표’에 관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떠오른 것은 문학사회학자 루시앙 골드만의 저작 『숨은 신(Hidden God)』이다. 골드만에 따르면 신은 사라진 게 아니라 단지 숨어 있을 뿐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비극적 세계관으로 표출된다. 골드만의 문학이론을 한국 정치에 그대로 적용할 순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민심이란 신(神)이 숨어 있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숨은 사회’가 아니라 ‘열린 사회’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