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집안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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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DJ의 침묵이 오래 계속되고 있다. 자기가 설립하고 차남이 맡고 있는 아태재단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세 아들이 모두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려도 그는 말이 없다. 동교동의 30년 집사라는 오랜 측근이 구속돼도 말이 없고, '영원한 비서실장'이라는 권노갑(權魯甲)씨의 정치자금 의혹이 불거져도 묵묵부답이다. 오직 지난번 수석비서관과 처조카 구속 때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짧게 사과했을 뿐 차남과 아태재단에 대해서도 이용호 게이트와 무관하다는 사무적인 해명을 했을 뿐이다.

아들·아태재단·집사문제 등이 침묵이나 사무적 해명으로 끝날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런 문제들이 그처럼 쉽게 넘어갈 수는 없어 보인다. 설사 지금의 특별검사팀 수사를 무사히 통과한다 하더라도 국민 마음 속에 의혹이 남아 있는 한 다음 정권에 가서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만일 DJ의 집안문제들이 정말 다음 정권에까지 넘어간다면 국가적 불행이다. 21세기의 새로운 국정전략을 짜야 할 새 정권이 구정권 문제에 묶여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해서야 될 일인가. 청문회니 재수사니 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갈등과 분열은 또 얼마나 심할 것이며 대외적으로도 나라의 큰 수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DJ 집안문제는 단순한 수사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부담을 던다는 차원에서라도 DJ 스스로 밝힐 건 밝히고 정리할 건 정리하고, 책임질 건 책임진다는 결의 표명과 결단이 필요하다. 침묵으로 수사를 지켜보는 것이 국정최고책임자의 자세일 수 없다. 무엇보다 아태재단·아들·처조카·집사문제 등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문제'다. '자기 문제'로 국정혼란·국민의혹이 일어나고 있는데 어떻게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대통령의 집안문제에 대해선 용기있는 부하도 차마 직언을 하기 어렵고 아무리 명(名)검찰이라도 수사에 곤혹감을 갖게 마련이다. 대통령 스스로 이런 벽과 한계를 허물어줘야 한다.

DJ로서도 이젠 '거두는' 계절이다. 재임 중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로,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로 거두는 것이 불가피하고, 그것을 조용히 수용해야 할 때가 됐다. 생각하면 소설보다 더 극적인 파란만장한 80생애였다. 고생도 영광도 많았지만 마침내 대통령이 되고,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노벨상도 탔다. 인간으로, 정치가로 최고봉에 올랐다. 더 이상 마음 졸이고 애태우며 추구할 일도, 욕심낼 일도, 남과 다툴 일도 없을 것 같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퇴임 후 청안(淸安)일 뿐 세속적 가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다면 아태재단이란 무엇일까. 원래 정계복귀의 발판이었던 아태재단인데 정계복귀의 궁극 목표는 이미 달성되지 않았는가. 더 이상 재단을 유지함으로써 눈총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차남을 재단에서 후퇴시키고 공익기관화 등의 정리를 서두를 때가 된 것 같다. 그동안의 기금운용 등에 관한 솔직한 백서를 내면 의혹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막내아들 집문제도 야당총재의 빌라나 그 아들 얘기로 상쇄시킬 수는 없는 문제다. 일정한 직업 없는 유학생이 무슨 돈으로 그런 집을 사고 미국 생활을 하는지에 관한 국민 의혹을 정면으로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솔직히 밝혀야 문제가 해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주변과 측근에서 비리·조폭·국정개입 따위의 말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역대 정권에서 지금처럼 아들·처조카·집사·비서 등의 잡음이 이렇게 쏟아진 때가 과연 있었던가. 왜 DJ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며 어떤 풍토, 어떤 분위기이길래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깊은 생각 끝에 그러잖아도 몸상태가 공직생활에 힘겨운 큰아들의 거취문제에 결단을 내린다든가, 혹 일가의 재산을 정리해 상당 부분을 사회에 기부한다든가 한다면 국민에게 일정한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찍이 없었으므로 다음 집권자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될 것이다.

이처럼 차원 높고 통이 큰 결단과 조치가 있을 때 집안문제는 좀더 쉽게 풀리고, 어떤 의미에서 전화위복의 단서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매일 애태우며 수사나 지켜보다가는 국민 의혹도 풀지 못하고 남은 11개월마저 날려버리기 십상이다.

침묵이 아니라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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