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살배기 '기적의 생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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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 2주일간 네 차례의 태풍이 할퀴고 간 필리핀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마닐라에서 동쪽으로 70㎞ 떨어진 레알 시(市)에서 매몰된 실종자 중 네 명이 건물 잔해 속에서 열흘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것이다. 그 중에는 세 살짜리 여아와 10대 소년 두 명이 끼어 있다.

올해 49세인 마리아 루바는 지난 9일 오후 손녀 에스텔라(3)의 손을 꼭 잡으면서 "하나님이 제2의 생명을 주셨다"며 눈물을 흘렸다. 루바가 2층 건물의 지하실에 매몰된 것은 태풍 '위니'가 몰아쳤던 지난달 29일 밤. 이 건물은 교회 겸 이재민 대피소로 쓰였으나 폭풍우와 산사태를 이기지 못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이들은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혔다.

루바는 헬리콥터로 군 병원에 긴급 호송된 뒤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 열흘 동안 건물 벽에 스며 흘러내리는 액체를 마시면서 버텼다"고 밝혔다. 이마저 없으면 젖은 진흙으로 입술을 축였다. 밀려드는 공포를 이기려고 넷이 손을 맞잡고 '우리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며 기도했다. 세 살짜리 손녀는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살아서 나갈 수 있어요'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이들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혼자 설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잔해진 상태다. 이날 구조됐던 이안 칼 분갓(14)은 "붕괴 직전에 건물 안에 150여명이 있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발굴된 시신은 모두 100여구. 그래서 현재 20여명이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 관계자는 "신음소리 같은 게 가끔 희미하게 들린다"고 말했다.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실종자 수색.구조작업에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했다. 필리핀에선 이번 연쇄 태풍으로 1800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필리핀 정부는 이재민이 300만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식수.음식.의약품 등을 대기에도 빠듯한 형편이다. 국제사회의 지원 규모는 375만달러(약 45억원)에 불과하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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