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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개혁 불발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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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신문을 받아들면 한 번 더 놀란다. “이게 다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얇기 때문이다. 르몽드 평일판은 전체가 26면이다. 한국 주요 신문의 절반도 안 된다. 양은 적은데 값은 비싸니 상품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는 셈이다. 신문업 종사자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다. 재료비(종이·잉크) 적게 들이고 값은 후하게 받는 프랑스 신문사들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 같았다. 활자 매체의 영역 축소가 세계적 추세지만 지성인들이 모여 산다고 자부하는 나라고, 신문 종류도 많지 않아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르몽드는 3일 경영권을 매각하기 위해 스페인·스위스 등의 미디어 그룹과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적자로 쌓인 빚을 갚으려고 기자와 임직원이 보유한 약 52%의 지분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프랑스 언론은 르몽드의 부채가 1억 유로(약 1470억원) 이상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1951년부터 기자와 임직원이 절반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자랑해왔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지킨다는 취지다.

8일에는 다른 일간지인 르파리지앵과 오주르뒤도 인수자를 물색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경기 침체로 광고가 줄어든 데다 인터넷과 영상 매체가 광고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생긴 일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프랑스의 신문 발행 부수가 크게 줄고 있다는 점이다. 르몽드의 경우 지난해 전년도에 비해 4.5% 줄어 하루 평균 28만8000부를 찍었다. 프랑스 신문의 총 판매 부수는 영국의 절반, 독일의 3분 1 수준이다. 문화대국에 걸맞지 않은 현실이다.

프랑스 신문 산업의 규모가 영국이나 독일에 비해 작은 이유 중 하나는 미디어 융합 측면에서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뉴스코프, 독일에서는 RTL과 같은 대형 미디어 그룹이 활자 매체와 영상 매체를 동시에 보유하며 콘텐트 교류 등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반면 프랑스는 2년 전 정부가 신문·방송 겸영 규제를 완화해 신문사의 경영 다각화를 보장하려 했으나 야당과 사회단체, 미디어 전문가 등이 “언론이 독점된다”며 반대해 불발로 그쳤다. 당시 계획 중 정부가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일주일에 한번 신문을 사주는 것 등의 직접적 지원책만 채택됐다. 정부가 여론의 눈치를 보다 미디어 개혁에 실패한 것이다.

르몽드는 1944년 프랑스가 나치에서 해방된 직후 샤를 드골 장군의 권유로 언론인 위베르 뵈브메리가 창간했다. 국가주의자인 드골은 독일 등 이웃 국가의 신문에 뒤지지 않는 신문을 원했다.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프랑스는 그 르몽드가 다른 나라의 대형 미디어 그룹에 팔릴지 모르는 상황을 맞고 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쓰인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떠오른다.

이상언 파리 특파원